•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가례』의 보급
  • 가묘와 종법
이영춘

조선 초기 조정에서 정책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던 유교 예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가묘 설치의 보급, 종법(宗法)의 강조, 화장의 금지, 삼년상제의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9월에 조준은 22개조의 상언(上言)에서 “사대부는 가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고, 서인은 정침(正寢)에서 부모를 제사케 하자.”라는 건의를 하여 왕의 승인을 받았다.164)『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9월 24일(임인). 그리고 이것이 법제화되어 1398년(태조 7)에 편찬된 『경제육전(經濟六典)』에는 위반자들에 대한 벌칙까지 규정되었다. 1427년(세종 9) 2월에는 문무 관료들의 가묘 설치를 강제하기 위하여 연한을 정하였는데, 2품 이상은 10년, 6품 이상은 12년, 9품 이상은 15년 안에 반드시 가묘를 설립토록 하였다.165)『세종실록』 권35, 세종 9년 2월 10일(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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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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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정의 법령에 의한 강행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 실정과 너무나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잘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기한을 정하여 사대부들에게 가묘의 건립을 독려하였고, 법사(法司)에서 단속하도록 하였으나 역시 잘 시행되지 않았다.166)1406년(태종 6) 대사헌 허응(許應)의 상소에는 “현재 가묘를 설치한 집이 백에 하나둘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 6월 9일(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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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의 가례 행렬_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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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의 가례 행렬_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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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대부 관료들의 가정에서도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는 가묘 제도에 대한 당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기도 하였고, 가옥의 구조나 형편에 맞지 않은 경우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오래된 불교적 인습과 의식 때문에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167)박연호, 「조선 전기 사대부례(士大夫禮)의 변화 양상」, 『청계 사학』 7, 청계 사학회, 1990, 75∼177쪽. 그래서 세종 때가 되면 관료들의 형편을 고려하여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가묘의 설치를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168)『세종실록』 권55, 세종 14년 2월 2일(신묘). 세종과 세조는 불교를 숭신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가묘의 설치에 대한 단속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 때 억불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가묘의 설치는 더욱 강제성을 띠게 되었고, 1473년(성종 4)에는 가묘를 설치하지 않은 관원 40여 명을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가묘의 설치와 관련된 단속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대체로 16세기부터 사대부 사회에서 가묘의 설치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혼례 방면에서는 『가례』의 친영례(親迎禮)를 장려하여169)『세종실록』 권18, 세종 7년 5월 12일(신사). 왕실에서 모 범을 보이기도 하였으나,170)1435년(세종 17) 3월의 숙신 옹주(淑愼翁主) 혼인을 비롯하여 여러 왕자와 공주의 혼례를 친영례로 하였으나, 사대부 중에서도 따르는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세종실록』 권67, 세종 17년 3월 4일(병자)). 워낙 토속적인 성격이 강하여 민간에서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례나 상례는 비교적 『가례』대로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제례의 기초 원리였던 종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고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상례 제도는 1408년(태종 8)에 이미 불교식 상례를 금지시키고 『가례』에 따르도록 방침을 정하였다.171)『태종실록』 권33, 세종 8년 7월 16일(임술). 1420년(세종 2) 11월에는 부재위모기제(父在爲母期制)의 복제가 시행되어 초상 후 11개월에 연제(練祭), 13개월에 상제(祥祭),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심상(心喪) 3년을 행하도록 하였다.172)『세종실록』 권10, 세종 2년 11월 27일(신묘). 1429년(세종 11) 4월에 전·후처는 모두 적실(嫡室)의 부인이므로 고례(古禮)에 따라 함께 사당에 부묘(祔廟)하도록 하였다. 또 1434년(세종 16)에는 계모에 대한 복을 『가례』에 따라 친모와 똑같이 하게 하였고,173)『세종실록』 권65, 세종 16년 7월 6일(신사). 1437년(세종 19) 6월에는 입후자(立後子)가 자신의 생가 친척을 위해서 상복을 한 등급 낮추어 입도록 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 5월에는 입후자와 입후한 부모 사이의 복을 친자와 같은 복을 입게 함으로써 유교적 명분론과 종법의 정신에 충실케 하였다.174)『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 5월 27일(임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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