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나라의 의례 『국조오례의』
이영춘

유교 정치의 이념에서 예(禮)와 악(樂)은 형식적이면서도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유교 국가에서는 의례(儀禮)를 대단히 중시하는데, 국가의 의례에는 음악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유교 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가장 시급히 여긴 문제는 의례 제도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주로 국가와 왕실 차원의 의례를 시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가의 전장(典章) 제도를 완비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만, 사대부와 서민들의 예법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유교 의례의 국가적 보급이라는 의미도 아울러 내포하고 있었다.

유교적 의례 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1410년(태종 10) 8월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였으나, 처음에는 활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의례 제도의 정비를 위한 고제(古制)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은 예조, 의례상정소,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에서는 의례 제도를 시행할 때 나타나는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주로 연구하였다.

조선 왕조의 유교 의례 틀은 대체로 세종대에 마련되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편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1456년(세조 2)에 『세종조상정의주(世宗朝詳定儀註)』와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를 편찬하였으며, 이는 성종대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집대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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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오례』
『세종실록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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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례(五禮)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역대 왕조에서 핵심이 되는 국가 의례로,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로 구성된다. ‘오례’란 용어는 『서경(書經)』이나 『주례(周禮)』 같은 고전에도 나오지만, 국가 의례로서 체계화된 것은 한나라 이후이며, 당 현종 때에 편찬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속칭 『개원례』)로 집대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반에 중국식의 제사 의례(祭祀儀禮)가 도입되었으나, 오례가 확립된 것은 고려 예종(1105∼1122) 때로 생각된다. 그것은 1234년(고종 21)에 최윤의(崔允儀) 등이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으로 재정리하였고, 그 일부가 『고려사』 「오례지(五禮志)」에 전한다.

오례의 길례 부분은 대체로 태종대에 허조(許稠) 등이 만들었다. 세종 때는 여기에 박차를 가하여 정척(鄭陟), 변효문(卞孝文) 등으로 하여금 흉례·군례·빈례·가례 부분을 편찬하여 오례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를 1451년(문종 1)에 책으로 편찬하였고, 1454년(단종 2)에 『세종실록』에 부록으로 붙였다.

태종대와 세종대의 의례 정비와 오례의 편찬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시행하던 전례(前例)와 고사(故事)를 기초로 하고, 당·송·명의 제도를 참작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상정고금예문』과 주자의 『가례』, 명의 『홍무예제(洪武禮制)』, 『대명집례(大明集禮)』, 『통전(通典)』 등을 주로 참고하였고, 기타 유교 고전과 조선 건국 이후 작성된 여러 의궤(儀軌)를 참조하였다.

『세종실록오례』는 훗날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1451년에 편찬한 『오례』는 미흡한 점이 많았으므로, 세조 때 강희맹(姜希孟) 등에게 명하여 보완하도록 하였다. 이때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도식을 따로 붙여 편찬하였다. 그 후 1474년(성종 5)에 신숙주(申叔舟), 정척 등이 완성하여 『국조오례의』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세종실록오례』는 각 예식의 진행 절차를 규정한 의식(儀式)과 그 예식에 필요한 인원, 물품, 장비, 시행 일시, 장소 등을 규정한 서례(序例)로 구성하였는데, 각 예(禮)마다 서례를 앞에, 의식을 뒤에 배치하여 합편(合編)하였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는 의식을 ‘의주(儀註)’라 하여 이들만을 수록하였고(총 8권), 서례는 따로 모아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라는 별책(총 5권)으로 편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국조오례의』는 『경국대전』과 함께 조선 왕조 전장 문물의 표상이 되었다. 이는 유교 의례를 완성하고 보급하려는 국가적 의지를 표방한 것이기도 하였다. 비록 이 책은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유교 국가로서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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