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3. 유교 예법의 책
  • 『가례』의 연구
이영춘

흔히 『주자가례』, 『문공가례(文公家禮)』 등으로 불리는 『가례』는 남송대인 1170년에 주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주자의 만년 저술과 다른 내용이 많고, 또 주자가 존중하던 『의례』와도 다른 곳이 적지 않다. 그래서 청대의 고증학자들은 결코 주자의 저서가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주자의 초고본(草稿本) 저술로 생각 되고, 미비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간결성, 실용성, 시의성, 내용의 일관성 등으로 인해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가례』는 주자의 학문적 명성에 편승하여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체재는 판본(板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통례’,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의 사례(四禮)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가례』는 하나의 예서로서는 비교적 소략한 편이며 여러 가지 미비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실제의 의례 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과 조선에서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주석서와 연구서가 많이 저술되었다. 명대 구준(邱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 김장생의 『가례집람』, 유계의 『가례원류』,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 같은 책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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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사례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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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조선 예학의 특징은 『가례』의 연구와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반 사대부 계층이 확대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예법과 의례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가례』에 경도된 예학자들 중에는 그것을 사회 전체적으로 보급하고 시행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 진보적 예학자들은 왕실에서도 『가례』를 준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의례생활에서 신분적 차이를 초월하려는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례』 연구 역시 영남 사림파 유학자들이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후에 남인 예학의 선구가 되었다. 따라서 남인 예학은 고례와 가례를 함께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언적(李彦迪)은 1550년(명종 5)에 『봉선잡의(奉先雜儀)』(1책)를 저술하였다. 『가례』의 사당편과 제례편을 중심으로 하고 사마광의 『서의(書儀)』와 우리나라의 속례(俗禮) 등을 참작하여 실용을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다. 16세기 사대부 계층의 『가례』 실천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저술이다.

이황(李滉)의 『상제례답문(喪祭禮答問)』(2책)은 상례와 제례에 관하여 퇴계와 제자들이 주고받은 문답을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이는 예서를 정밀하게 고증한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것을 간략히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다소의 오류가 있게 되었다. 그의 제자 이덕홍(李德弘)의 『가례주해(家禮註解)』는 『가례』의 차례와 항목에 따르지 않고 난해한 부분만을 주해하였다. 사당도(祠堂圖) 등 4편의 그림에 대한 해설과 통례(通禮) 등 30여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성룡(柳成龍)의 『상례고증(喪禮考證)』은 ‘상제(喪制)’ 3편과 상제에 따른 상복을 도식화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가례』를 중심으로 하고 『예기』와 『의례』를 참고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저술한 같은 이름의 『상례고증(喪禮考證)』도 사본으로 전하고 있다.

조호익(曺好益)의 『가례고증(家禮考證)』(7권 3책)은 1646년(인조 24)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가례』의 본문 중 어려운 부분을 뽑아 고증과 해석을 붙인 것으로 총 400여 항목을 수록하였다. 이 책은 『가례』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서라고 할 수 있으며, 후대 『가례』 연구의 선례가 되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가례질서(家禮疾書)』는 『가례』에 관한 여러 학설을 종합·분석하고 우리의 실정에 알맞도록 새로운 해석을 붙여 만든 책이다. 서문에서 “예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시의(時宜)에 맞도록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정약용의 『사례가식(四禮家式)』(9권)은 그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가례서이다. 현행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이를 해체하여 『상의절요(喪儀節要)』, 『제례고정(祭禮考定)』, 『가례작의(嘉禮酌儀)』 등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이상은 17세기와 18세기에 남인이 저술한 예서 중에서 중요한 것만 들 어본 것이다. 이들 중에는 순수하게 학문 연구를 위한 저술도 있지만, 대개는 실용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이는 그만큼 『가례』의 실천 의지가 강하였고 또 광범하게 보급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선 중기 『가례』 연구의 중심은 서인 예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 학문의 커다란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인 예학은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시작되고 김장생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이후 서인 예학은 모두 김장생의 제자와 그들의 후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인 예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송익필은 『가례』 주석서인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저술하였다. 이는 『의례』, 『예기』 등의 경전과 많은 학자의 예설을 인용하여 세밀하게 주석한 책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도 첨부하였다. 김장생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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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집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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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의 『가례집람』(10권 6책)은 1685년(숙종 11)에 처음 간행되었다. 이 책은 『가례』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집성하였는데, 『의례』, 『예기』 등의 경전과 『통전』, 『대명률』, 『경국대전』 등 많은 문헌을 인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전래 예속도 참고하였으며, 저자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도 첨부하였다. 이 책은 『가례』의 연구와 실천에 요긴하여 널리 보급되었고, 17세기 조선 예학의 수준과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의례문해』는 김장생이 사우(師友) 문인들과 예법을 문답한 책으로 『주례』, 『의례』, 『가례』, 『의례경전통해』, 『가례의 절』, 『통전』 등 많은 예서를 참고하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는 원래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것을 김장생이 보완하여, 1648년(인조 26)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가례』 중에서 상례편의 소략하고 미비한 점을 보완하고 실용에 편리하도록 해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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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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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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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10권 4책)는 『가례』를 언문으로 번역한 책이다. 본문의 번역 외에도 연호(年號), 인물, 서명(書名), 어려운 용어에 간단한 주석을 붙였다. 이 책은 『가례』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고, 사회 저변에 널리 보급되었다.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지은 『가례원류』(14권 8책)는 『가례』 본문을 대본으로 하여 『의례』, 『예기』, 『주례』 등 고전 근거를 ‘원(源)’으로 발췌하여 붙이고, 후대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유(流)’로 첨부하였다. 이 책은 『가례』의 조문에 관련되는 경전 근거와 여러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편집하여 연구자들이 참고하는 데 편하게 하였다.

이재의 『사례편람』은 『가례』에서 실제 활용에 긴요한 관혼상제의 사례만을 모아 해설한 것으로 편의성과 실용성에 치중하여 편집되었다. 『가례』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많은 예서를 참고하였고, 특히 상례 부분은 『상례비요』를 근간으로 하였다.

이의조의 『가례증해』(14권 10책)는 1792년(정조 16)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김장생 이래 이재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노론 학파의 『가례』 연구를 집성한 방대한 예서로, 서인 학자들의 예설을 주로 하였지만 이황, 정구 등의 예설도 광범하게 인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편집서와 같은 성격이 강하지만 내용이 풍부하고 해설이 보편성을 띠고 있어 널리 보급되고 많이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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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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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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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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