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4. 유교 의례의 표상, 제사
  • 가정의 제사
이영춘

동아시아 유교 사회의 사대부가 및 서민들의 민가에서 전통적으로 행해 온 제사는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와 가신(家神)들에 대한 제사 곧 고사(告祀)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가례』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유교 제사이며, 후자는 토속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 고대 중국에 기원을 둔 것으로 유교적 제사에 흡수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사는 유교의 오사(五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오사는 『논어(論語)』에 언급되어 있다.210)『논어집주(論語集註)』 권3, 팔일(八佾).

전통시대에 가장 중요한 조상 제사는 사시제(四時祭)였다. 이는 보통 시제(時祭)라고 부르는데, 사계절의 가운데 달(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고조 이하의 조상을 함께 제사하던 합동 제사였다. 그러나 일 년에 네 번씩 제사를 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이익이나 정약용 같은 학자는 일 년에 봄가을로 두 번만 시행토록 권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는 일 년에 한 번만 행하는 가정이 많았다.

시제는 일종의 축제와도 같아서, 제사를 마친 후에는 친지와 이웃을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제사는 길례(吉禮)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기일 제사(忌日祭祀)가 중시되면서 시제에 대한 인식은 점차 퇴색해 갔다.

기일 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올리는 제사로 ‘기제(忌祭)’ 혹은 ‘기제사’라고도 부른다. 이는 고대에는 없던 제사였으나, 송대 성리학자들이 시작한 제사이다. 기제사는 매우 신중하게 거행되었으며, 절차도 다른 제사와 차이가 있었다. 초헌 후에 곡하는 절차가 있었고,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기제사가 중시되어 모든 제사에 우선하였고, 제수도 풍성하게 차렸다가 친지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행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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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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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제(墓祭)는 『가례』에서 매년 3월 상순에 하도록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10월에 많이 행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고례에 없던 것인데, 남송대에 주자가 세속 풍습에 따라 『가례』에 수록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매년 사명절(四明節, 청명, 한식, 단오, 추석)에 묘소에서 제사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묘제를 시제(時祭)라고 하며, 일 년에 한 번씩 음력 10월에 5대조 이상의 먼 조상을 제사하였다. 묘제는 제사 지내는 장소가 산소이므로 진행 차례도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와 다르고 또 산신에 대한 제사가 따로 있었다.

명절제(名節祭) 혹은 속제(俗祭)라고도 하는 차례(茶禮)는 설, 추석 등에 지냈다. 차례는 오늘날 대표적인 제사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는 예법에 있는 제사가 아니었다. 차례는 명절날 조상을 추모하고 새로 난 음식물을 올리기 위하여 마련한 약식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제가 쇠퇴한 후 차례가 시제와 같은 기능을 갖게 되면서 중시되었다. 차례는 제사의 대수 안에 있는 조상들을 함께 모시는 합동 제사이다. 차례는 설날에는 집에서 지내고, 한식과 추석에는 묘소에서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고사는 일반적으로 집안의 평안을 위해 가신들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이는 주로 음력 10월 상달에 지냈다. 고사는 ‘고시레·고사·굿’을 같은 성격으로 토속적인 민속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교 제사인 오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사란 봄에는 창호, 여름에는 부엌, 가을에는 대문, 겨울에는 골목, 늦여름과 토왕일(土旺日)에는 중류(中霤)에 제사하는 것이다. 이 다섯 신에게 제사할 때마다 오(奧, 안방의 성주신)에도 제사한다. 이는 종묘의 칠사와 유사하다.

유교의 오사는 계절마다 한 번씩 지내지만, 우리나라의 고사는 일반적으로 음력 10월에 한 번 지냈다. 그러나 집안의 여러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라는 점에서는 성격이 같다. 전통시대 유학자들의 집에서는 이를 유교식 제사로 지냈지만, 일반 민가에서는 토속 제사로 지내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굿으로 하기도 하였다. 토속적으로 지내는 경우에는 좋은 날을 가려서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서 집 안으로 부정이 들지 않도록 하고 제물로 시루떡과 술을 준비하여 차려 놓고 비손과 소지(燒紙)로 정성을 드렸다. 이를 마을 단위로 행하는 동고사(洞告祀), 당고사(堂告祀) 또는 서낭 고사와 같은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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