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5장 실학의 세계관
  • 1. 해외여행과 새로운 정보
  • 18세기, 여행의 시대
김문식

우리나라 역사에서 18세기는 ‘여행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내의 명승지(名勝地)를 즐겨 찾았으며, 그 중 일부는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사신단(使臣團)의 일행으로 해외여행(海外旅行)을 할 수도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방문하는 국내의 명승지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15세기에는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송도(松都, 개성)와 지리산을 즐겨 찾았고, 16세기에는 금강산과 강원도 지역, 단양, 청량산, 소백산이 새로운 여행지로 인기를 끌었다. 17세기 이후에는 금강산과 강원도 지역이 대표적인 명소로 부각되어 이에 관한 시, 산문, 그림이 많이 작성되었고, 그 이후로 백두산, 설악산, 평양 등이 추가되었다.

18세기 지식인인 어유봉(魚有鳳, 1672∼1744)은 자신의 동생인 어유붕(魚有鵬)이 금강산 비로봉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축하해 주었는데, 금강산 유람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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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전도(金剛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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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고, 비로봉은 금강산에서 제일이다. 우리나라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지 못하면 고루하고, 금강산을 유람해도 비로봉에 오르지 못한다면 어찌 유람하였다고 하겠는가.211)어유봉(魚有鳳), 『기원집(紀園集)』 권21, 「서여제지원등비로봉기후(書余弟志遠登毗盧峰記後)」.

또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여행 안내서라 할 수 있는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를 작성하였는데, 이는 전국을 여덟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유명한 산을 자세히 소개한 책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렵사리 기회를 만들어 명승지를 유람하면, 그 추억이 사라질까 하여 여행 당시의 느낌을 표현한 시를 짓거나 여정(旅程)을 자세히 기록한 기행문(紀行文)을 남겼다. 18세기에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형제는 전국의 산수를 여행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는데, 여기에 뛰어난 화가인 정선(鄭歚, 1676∼1759)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여행을 다녀오면 여정을 기록한 시와 산문, 그림을 작성하여 돌려보았는데, 정선의 금강산도(金剛山圖)도 이때 나온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명승지만 여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한강 변에 멋있는 정자를 짓거나 한양에서 가까운 산 아래의 물가에 조그만 정자가 딸린 별장(別莊)을 마련해 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잠시나마 은자(隱者)처럼 생활하는 것을 운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도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에는 아예 집에다 정원이나 동산을 조성하고, 방 안에는 산수화를 걸어 두고 보거나 산수를 유람한 기록을 읽으면서 산수 속에 노니는 자신을 상상하였다.

18세기에는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을 가진 ‘와유(臥遊)’가 유행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무에 바쁘거나 여행 경비가 모자라 명승지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여행기나 산수도를 보면서 그들과 함께 여행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으려고 하였다. 김창협은 금강산 길에 기행문을 가지고 갔는데, 이는 기행문을 지방별로 분류해 놓을 정도로 전문적인 책이었다. 이때에는 여행지를 그린 산수도가 유행하였는데, 금강산도의 경우에는 정선과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것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평안도의 명승지를 그린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 함경도 함흥의 경치를 그린 『함흥내외십경도(咸興內外十景圖)』, 경상도의 빼어난 경치를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이나 『영남명승삼십오경첩(嶺南名勝三十五景帖)』 등이 모두 18세기에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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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통군정도(義州統軍亭圖)
의주통군정도(義州統軍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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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팔선와유도(八仙臥遊圖)’란 놀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 놀이는 전국의 명승지 81곳을 종이 위에 배열하고 시, 문, 글씨, 그림, 술, 바둑, 거문고, 검으로 구성된 팔선(八仙)이 이곳을 유람하면서 가는 곳마다 다양한 문체의 시와 문장을 짓는 놀이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 전국의 빼어난 경치와 인물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현장을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18세기에는 해외여행도 성행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과 중국에서는 권력의 재편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조선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성립되어 안정기에 들어갔고,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모두 단절하였다. 그러나 새로 성립된 도쿠가와 막부가 외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일본과 힘을 합하여 청나라를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1607년(선조 40)에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사신단을 파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사신단의 파견을 요청해 온 일본의 국서(國書)에 회답을 보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찾아서 데려온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에 조선 정부는 ‘신의를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란 이름을 회복시켰고 이후 총 12회에 걸쳐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이후 쓰시마 섬(對馬島), 규슈(九州)를 거쳐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 오늘날의 동경)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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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중 정사 부분
통신사행렬도 중 정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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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한 조선 정부는 명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와 외교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청나라가 북경(北京)을 점령하는 1644년까지 명나라와의 외교를 유지하였다. 청나라가 중국의 남방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한 것은 16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는 본격화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총 700회에 걸쳐 연행사(燕行使)를 파견하였다. 연행사 일행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간 뒤 심양(瀋陽),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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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성시도(燕京城市圖) 부분
연경성시도(燕京城市圖)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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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조선, 청나라, 일본은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 들어갔고,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특히 조선 정부는 두 나라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 가운데 한꺼번에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신단을 파견하여 상호 교류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에는 연행사를 700회 파견하고 일본에는 통신사를 12회 파견한 차이에서 보듯, 교류의 빈도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매년 1∼4회씩 고정적으로 연행사를 북경에 파견하였지만, 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에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할 때에만 보냈다. 또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에는 야만(野蠻)의 문화가 있지만 청나라에는 중화(中華)의 선진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중국으로의 여행을 선호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누구나 중국 여행을 꿈꾸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구체 적인 장소를 알 수 없는 중국의 산수도나 사시도(四時圖), 중국 남방의 경치를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나 서호도(西湖圖) 같은 그림을 벽에 걸어 두고 중국의 산수를 상상하였고, 성리학에 심취한 학자들은 주자(朱子)와 인연이 깊은 무이정사도(武夷精舍圖)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바라보며 그곳을 여행하기를 꿈꾸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특히 학문의 중심지였던 중국의 강남 지방을 그리워하였는데, 이들이 가장 여행하기를 희망한 곳은 악양루(岳陽樓), 동정호(洞庭湖), 서호(西湖), 황산(黃山)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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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도
소상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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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도
소상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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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8세기에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지은 시인데, 옛 기록을 통해 강남의 경치를 짐작하지만 현장을 직접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노래하였다.

계림(桂林)은 교남(嶠南)에 있고, 여산(廬山)은 광서(廣西)에 있네

만 리 남짓 떨어져 있으니, 가고 싶지만 어찌 갈까

옛사람이 빼어난 경치를 기록하여 문자로 읽을 수는 있지만

꾸밈이 심하고 착오도 많아 명성과 실제가 어긋나지 않을까

나는 바다 동쪽 구석진 땅에 태어나, 배포가 겨우 초파리만 하다오212)이하곤(李夏坤), 『두타초(頭陀草)』 책 9, “숙구정지야 월색여주 사선엄약군선상대 진천하기관야(宿九精之夜月色如晝四仙儼若群仙相對眞天下奇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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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구곡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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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구곡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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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꿈꾸었고 일부는 그 꿈을 이룰 수도 있었다. 조선인이 해외여행을 하려면 청나라나 일본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에 포함되어야 하였으므로 그 인원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어렵게 사신단에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지역은 사신단이 지나가는 이동로 주변의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청나라와 일본의 실상을 파악하였고 북경에 거주하는 서양인 선교사(宣敎師)를 통해 서학(西學)을 접촉할 수도 있었다. 사신단에 포함되지 못한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 경험담을 듣거나 이들이 구입해 온 서적이나 그림을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18세기는 여행의 세기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내 여행을 통해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고, 해외여행을 통해 동아시아 삼국의 변화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졌으며, 이는 적극적인 개혁 운동으로 나타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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