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5장 실학의 세계관
  • 1. 해외여행과 새로운 정보
  • 새로운 학문 정보의 교환
김문식

조선의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학문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각자가 여행지에서 확보한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였으며, 교유하는 벗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 정보를 확산시켰다.

오륜의 하나인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신의를 바탕으로 한 벗과의 교유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교유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며, 왕래가 잦아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이, 출신, 지역, 국가로 구획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조선의 18세기는 기존의 경계를 넘어 교유가 확대되는 시대였다. 조선 후기의 학계는 한양과 경기 지역을 포괄하는 수도권, 충청권, 경상권, 호남권(전라도 지역), 서북권(황해도·평안도 지역)으로 구별되었다. 이 중에서 학계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수도권이었는데, 외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학문 정보가 일단 수도권에 집결된 후에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수도권에는 학문 경향 내지는 정치 성향에 따라 몇 개의 지식인 그룹이 구분되어 있었다. 먼저 노론(老論)은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구분되었는데, 호론계 지식인이 충청권에 거주하였다면 낙론계 지식인은 수도권에 거주하였다. 수도권에 살던 노론 낙론계 그룹에는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성해응(成海應, 1760∼1839),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조인영(趙寅永, 1782∼1850), 권돈인(權敦仁, 1783∼1859)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해외여행 경험이 가장 많았던 그룹으로, 자신이 가졌던 학문 정보를 그룹 내의 교유를 통해 확산시켰다. 박지원은 낙론계 지식인들이 교유하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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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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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 4년경 7월 13일 밤에 박제도(朴齊道), 이희경(李喜經), 이희명(李喜明), 원유진(元有鎭), 이덕무(李德懋), 서유린(徐有隣) 등이 박지원의 전의감동 집을 찾아왔다. 박제도가 50전을 내어 사 온 술로 그들은 함께 취하고 운종가(雲從街, 종로)로부터 달빛을 타고 종각 밑으로 몰려갔다. 야간 시각을 알리는 북이 3경 4점을 치고, 달빛이 밝아 사람들의 그림자는 열 길이나 되었다. 그들은 운종가 난간에 기대어 6년 전 대보름날 밤에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이 다리 위에서 장난치면서 놀았던 일을 떠올리고 이제 관리가 되어 지방으로 떠난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 하였다. 그들이 어울려 수표교(水標橋)로 돌아 나오는데, 달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달빛이 더욱 또렷해졌다. 그들은 옷과 갓이 이슬에 다 젖도록 수표교 위에 늘어 앉아 놀았다.213)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권10,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단순히 놀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서 확보한 정보를 교환하고, 향후의 대안을 모색하며 토론을 벌이는 자리였다. 박지원은 박제가의 저술인 『북학의(北學議)』 서문을 작성하면서 그들의 교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내가 연경(燕京, 북경)에서 돌아오자 재선(在先, 박제가)이 자기의 『북학의』 내·외편을 내게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연경을 다녀온 사람이다. …… 한번 책을 들춰 보니 내 일기(『열하일기』)에 기록한 것과 다른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즐겁게 나에게 보여 주었고, 나도 기꺼이 사흘이나 읽었지만 싫증이 나지 않았다.

아아, 우리 두 사람이 중국을 목격하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겠는가. 일찍이 비 내리는 지붕이나 눈 내리는 처마 아래에서 연구하였던 것, 술이 거나하고 등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토론하였던 것을 한번 눈으로 체험하였을 뿐이다.214)박지원, 『연암집』 권7, 「북학의서(北學議序)」.

수도권에는 소론계(少論系) 지식인 그룹이 있었는데 윤증(尹拯, 1629∼1714),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서명응(徐命膺, 1716∼1787), 서형수(徐瀅修, 1749∼1824), 이만수(李晩秀, 1752∼1820), 신작(申綽, 1760∼1828), 홍양호(洪良浩, 1724∼1802), 홍경모(洪敬謨, 1774∼1851) 등이었다. 소론계 지식인들도 해외여행 경험이 많았으며 새로운 학문 경향을 적극 도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수도권에는 남인계(南人系) 지식인 그룹도 있었다. 이익(李瀷, 1681∼1763),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이맹휴(李孟休, 1713∼1751),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용(丁若鏞, 1764∼1836) 등이었는데, 이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그 후손과 제 자로 구성되었다. 남인계 그룹은 노론계나 소론계 지식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외여행 경험이 적었지만, 사회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개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용은 이익 집안의 학문을 ‘일가학림(一家學林)’, 곧 한 집안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숲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우리 성호(星湖, 이익) 선생은 하늘이 내신 빼어난 호걸로, 도덕과 학문이 고금을 통해 견줄 만한 사람이 없고,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큰 학자가 되었다.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은 『역경(易經)』과 삼례(三禮, 『예기(禮記)』·『주례(周禮)』·『의례(儀禮)』)로, 만경(萬頃, 이맹휴)은 경제실용(經濟實用)의 학으로,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은 문학(文學)으로, 장천(長川, 이철환(李喆煥))은 박물학(博物學)으로,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는 예학(禮學)으로, 섬촌(剡村, 이구환(李九煥))은 조부의 뒤를 이어 무예로 이름이 났다. 한 집안 학문의 번성함이 이와 같았다.215)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시문집(詩文集), 권15,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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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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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는 중인층 그룹도 있었다. 중인층은 양반가의 서자(庶子) 출신,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처럼 전문 기술을 가진 관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학문 지식이나 경제력을 가지고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또 역관은 해외로 파견되는 사신단에 반드시 포함되는 전문 관리로서 풍부한 학문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성해응, 박제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낙론계 그룹이지만 양반가의 서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인층 그룹으로서의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노론의 낙론계와 소론계, 남인계, 중인층 그룹은 우 선 그룹 내의 교류를 통해 새롭게 습득한 학문 정보를 교환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그룹의 경계를 넘어 인근에 거주하는 다른 계열의 지식인과도 교유하였다. 박지원은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분할된 당색(黨色)이나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으로 구획된 신분은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귀천이 달라도 덕이 있으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아도 인(仁)을 도울 수 있으면 벗할 수 있다.”라고216)박지원, 『연암집』 권3,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 하였다. 경계를 넘어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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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도(奎章閣圖)
규장각도(奎章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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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수도권에 거주하던 지식인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게 된 데에는 정조의 학문 정책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과 검서관(檢書官)이란 직제를 두어, 젊고 학문이 뛰어난 관리들을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다. 정조는 이들에게 전통적인 경학(經學)과 역사학(歷史學)의 연구는 물론이고 청나라에서 새롭게 입수되는 학문 정보를 연구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혁적인 정치 이념을 마련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해 나갈 실무 세력을 양성하였다. 이에 따라 서명응, 서호수(徐浩修, 1736∼1799), 정약전, 이가환, 정약용, 이덕무, 유득공(柳得恭, 1748∼?), 박제가 등이 규장각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수도권의 각 지식인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조가 주도하는 규장각의 교육 프로그램과 국가적 편찬 사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새로운 학문 정보를 접하고 상호 교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국경을 넘어 해외 학자와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16세기 말에 중국에 온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중국명 이마두(利瑪竇))는 『교우론(交友論)』이라는 책을 한문으로 저술하였는데, 그 속에 ‘벗은 제2의 나’라는 구절이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시대를 사는 벗들의 우정을 강조한 이 말은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17세기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이를 매우 기묘한 말이라 생각하였고, 18세기의 박지원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동시대의 벗을 사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라파국(歐羅巴國)의 풍속에는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 한다. 혼인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교황의 지위를 계승하는 아들이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세운다. 또 그 풍속은 우의를 소중히 여기며 사사로운 저축을 하지 않는다. 그(마테오리치)는 『중우론(重友論)』(『교우론』을 말함)을 저술하였는데, 초횡(焦竑)이 말하기를, “서역 사람인 이마두(마테오리치) 군이 ‘벗은 제2의 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기묘하다.”고 하였다. 이 일은 『속이담(續耳潭)』에 자세히 나온다.217)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芝峯類說)』 권2, 외국(外國).

옛날에 벗을 말하는 자는 벗을 두고 ‘제2의 나’라고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하였다. 이 때문에 글자를 만든 자가 우(羽) 자를 빌려와 붕(朋) 자를 만들고, 수(手) 자와 우(又) 자를 가지고 우(友) 자를 만들었는데,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양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는 ‘천 년 전의 옛날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하는데 이 말은 답답하다. 천 년 전의 사람은 이미 변화하여 흩날리는 티끌이나 서늘한 바람이 되었는데, 장차 누가 나를 위해 ‘제2의 나’가 되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한단 말인가. …… 벗은 반드시 지금 당대에서 구해야 한다.218)박지원, 『연암집』 권3, 「회성원집발(繪聲園集拔)」.

조선의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외국의 벗들과 교유하였다. 홍대 용은 “뜻과 도가 훌륭하고 진실하다면 국내뿐만 아니라 만 리 바깥에 있는 외국인과도 사귈 수 있다.”라고 선언하였는데, 그가 중국 강남의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것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홍대용과 강남 지식인들이 남긴 필담(筆談)은 『회우록(會友錄)』으로 정리되었는데, 박지원은 그 서문을 지으면서 외국인과의 교유를 부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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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초상
홍대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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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보(洪德保, 홍대용) 군이 일찍이 한 필의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서, 시가지(市街地)에서 방황하고 서민 속에서 맴돌다가 항주(杭州)에서 올라와 유학하는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남이 보지 않는 틈에 여관으로 찾아가니, 옛 친구와 같이 반기면서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근원,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의 구분 같은 것을 끝까지 토론하였다. 그 논거가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고, 서로 충고하고 선도해 주는 말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측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를 알아주는 벗으로 사귀다가 마침내 형제가 되기로 결의하여,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기를 기욕(嗜欲)과 같이 하고, 서로 저버리지 않기를 굳게 맹서하여 그 의리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 홍 군은 벗 사귀는 도리를 통달하였다. 내 이제야 벗 사귀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그가 벗을 사귀는 것을 보았고 그가 벗이 되는 것도 보았으며, 또한 내가 벗하는 것을 그는 벗하지 않음도 보았다.219)박지원, 『담헌서외집(湛軒書外集)』 권1, 「회우록서(會友錄序)」.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신분, 당색, 국경의 경계를 넘어 활발하게 교유하였고, 이를 통해 학문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들은 정보의 교환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성립시켰고, 마침내 사회를 개혁할 방안까지도 마련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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