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5장 실학의 세계관
  • 2. 지식인이 해야 할 일
김문식

해외를 여행하거나 해외에서 입수된 학문 정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이 유일하게 중화 문화를 계승한 문화 국가이며, 청나라가 중원 땅을 차지하였지만 그들의 지배는 일시적이고 조만간 한족(漢族)이 세운 국가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였다. 이들은 청나라를 그저 오랑캐 국가로 간주할 뿐 무력 외에 다른 장점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안정기에 들어가고 청 황실이 방대한 편찬 사업을 벌이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점차 강성해지는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지못해 일본과 공식 외교를 재개하였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선을 침략한 원수의 나라였고 중화의 문화를 모르는 오랑캐 국가였다. 그러나 통신사 파견이 거듭되면서 일본이 무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상업이 활성화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도시의 발달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이 유학을 숭상하고 예의를 실천하는 문 화 국가이기는 하지만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는 청나라나 일본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식인들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방안을 제시할 임무가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였다.

18세기에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농업, 공업, 상업과 같은 생산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대부들이 명분에 사로잡혀 과거(科擧) 공부에만 매달리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대부들이 상인이 된다면 경영의 합리화를 가져와 상업계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공업이나 상업은 참으로 말업(末業)이지만 원래부터 바르지 않거나 천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재주와 덕행이 없어 조정에서 녹봉을 받지도 못하고 남에게서 받아먹지도 못할 것을 안 까닭에, 몸소 수고하여 물자를 유통, 교역시킴으로써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는 일인 것이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백성들이 항상 이렇게 해 온 것인데, 무엇이 천하고 더러워 이런 일에 종사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중국을 보면 …… 착실히 배워도 자질이 우둔하여 끝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반드시 공부를 포기하고 농업, 상업, 공업, 세 가지 일에 종사한다. 대체로 열다섯 살 이전에 자기가 나아갈 바를 결정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없으며, 사민(四民, 사대부와 농업·공업·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함)의 일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 모습을 지키는 것이라 하겠다. 어찌 우리나라 사대부처럼 게으르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인(文人)이나 무인(武人)이 아니면서도 놀고먹으며, 안주할 곳이 없으면서 ‘사대부’란 세 글자로 높은 체하는 허망한 것과 같으랴.220)유수원(柳壽垣), 『우서(迂書)』 권1, 논려제(論麗制).

박지원은 조선의 산업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위축된 것은 사대부들의 잘못 때문이며, 이들이 농업, 상업, 공업의 이치를 연구하여 산업을 일으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산업이 위축된 것은 사대부가 실학(實學)을 하지 않은 탓이다. 사대부의 학문은 농업, 상업, 공업의 이치를 겸하며, 이 세 가지 산업은 사대부의 학문을 기다린 다음에 완성된다. 사대부는 농업, 상업, 공업의 이치에 관한 실학에 종사하여 이를 진흥시켜야 한다.221)박지원, 『과농소초(課農小抄)』, 제가총론(諸家總論).

박지원은 사대부가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청나라가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목격하자,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하인에게라도 묻는 법이라며 청나라가 오랑캐 국가이든 아니든 그들에게는 배울 것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학문을 하는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잡고 묻는 것이 옳다. 비록 종이지만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우선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신이 남과 같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이것은 종신토록 고루하고 무식한 테두리에다가 자신을 가두는 것이 된다.222)박지원, 『북학의내편(北學議內篇)』, 서(序).

박제가는 사대부가 놀고먹는 것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좀과 같은 것으로, 사대부들이 생산 분야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민(四民)으로 구분되는 직업의 차별을 없애고 관리가 되지 못한 사대부는 모두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게 하며, 해당 분야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을 발탁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자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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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큰 좀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는 사족(士族)이 날로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가 온 나라에 깔려 있어 한 가닥 벼슬로는 모두 옭아맬 방법이 없으며, 그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따로 마련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근거 없는 소문을 날조하는 무리가 사라지고 국가의 통치가 제대로 시행될 것입니다.

신은 수륙 교통의 요지에서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족에게 허락하여 입적(入籍)할 것을 요청합니다. 밑천을 마련하여 빌려 주기도 하고, 점포를 설치하여 장사하게 하고, 그 중에서 인재를 발탁함으로써 그들을 권장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점차로 놀고먹는 추세를 줄입니다.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그들이 가진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킵니다. 이것이 현재의 사태를 바꾸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223)박제가(朴齊家), 『북학의외편(北學議外篇)』, 병오소회(丙午所懷).

정약용은 사대부는 모두 관리가 될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며, 이들에게는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임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옛적에 도(道)를 공부하는 사람을 ‘사(士)’라고 하였는데, 사는 ‘벼슬한다(仕)’는 뜻으로 상등인 자는 나라에 벼슬하고 하등인 자는 대부에 벼슬하였다. (그러니) 벼슬을 함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를 사(士)라고 하였다.224)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오학론(五學論).

정약용은 사대부의 모범이 되는 인물로 주자를 꼽았는데, 주자는 학자로서는 유학의 경전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중앙의 관리가 되어서는 군주와 권력자의 잘못을 바로잡고 국가를 경륜하였으며,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일반 백성을 다스리는 세 가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주자는) 육경(六經)을 연구하여 진위를 판별하고, 사서(四書)를 드러내어 심오한 뜻을 계발하였다. 중앙에 들어와서는,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과 같이 학문과 언론을 관장하는 기관을 말함)의 관리가 되어 곧고도 과격한 언론으로 죽음을 돌보지 않고 임금의 허물과 권력자의 잘못을 공격하였다. 천하의 대세를 토론하고 군사의 기밀을 거침없이 말하여 (원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 대의를 천추(千秋)에 펴고자 하였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고을의 수령이 되어 어질고 자상한 규범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일을 살펴서, 세금 부담을 공평하게 하고 흉년과 역병(疫病)을 구제하였으니, 그 큰 강령(綱領)과 자세한 조목(條目)은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도 충분하였다. 그가 관직에 나가 처신한 것이 올바르니, 부르면 조정으로 들어오고 보내면 고향으로 돌아가되, 임금께서 사랑하심을 정성스럽게 간직하여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임금을 사랑하는 애틋한 정은 감히 잊은 적이 없었으니, 주자가 언제 지금 사대부들 같은 짓을 한 적이 있는가.225)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오학론 1.

이렇게 볼 때 정약용은 은사(隱士)를 자처하면서 국왕이 불러도 좀처럼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벼슬길에 나서서는 국왕이나 세자를 교육시키는 일만 담당하고 구체적인 실무를 맡기면 대접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산림(山林)은 지식인으로서의 소임을 방기(放棄)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사대부가 과거 공부에만 몰두하다가 관리가 된 이후에는 예악(禮樂), 법률(法律) 같은 실제 사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행정과 군사 에 관한 실무를 전혀 챙기지 못하는 무능한 관리를 비판하였다.

일단 과거의 학문에 빠지면 예악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형정(刑政)을 잡된 일로 여긴다. 그리하여 지방관에 임명되면 사무에 깜깜하여 아전(衙前)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내직(內職)에 들어와 재무(財務)와 옥사(獄事)를 담당하는 관리에 임명되면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祿俸)을 타 먹으면서 그저 예전의 관례만 물어 일을 처리하려 한다. 외직(外職)에 나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막아야 하는 임무를 맡기면,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인을 추대하여 전열에 세운다. 이런 사람을 천하에 어디다 쓸 수 있겠는가.226)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오학론 4.

서유구(徐有榘, 1764∼1845) 역시 사대부들이 실무에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사대부가 중앙 관리나 지방관이 되었을 때 아무런 실무 지식이 없어 일체의 사무를 서리(胥吏)에게 맡겨 놓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는 지방관이 서리들의 부정을 막고 농정(農政)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량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실무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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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 초상
서유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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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무에 힘을 써서 경제력이 늘어나고 국방력이 강화된다고 해서, 인간의 욕구가 모두 충족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제가가 청나라에서 발견한 것은 세련되고 우아한 문명의 세계였다. 박제가는 사람이 서화(書畵)와 골동(骨董)에 취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질적으로 더욱 고양된 삶이라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배우는 것이 과거 시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견문은 조선의 강역(疆域)을 넘어보지 못하였다. 대장경(大藏經) 종이를 접하면 더럽다고 여기고, 밤색 빛깔이 나는 화로(火爐)를 보고는 더럽다고 간주하면서, 점차 세련되고 우아한 문명 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켜 버린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날개나 더듬이에서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환경에 나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덩이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더듬이와 날개에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27)박제가, 『북학의내편』, 고동서화(古董書畵).

조선의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임무를 자각하고 실제의 사무에 대한 능력을 중시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취미 생활을 통해 개인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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