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5장 실학의 세계관
  • 3. 생산 기술의 개선
김문식

조선의 지식인이 목격한 청나라 도시의 풍경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반듯하게 정리된 도로에는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바삐 움직였고, 도로변에 벽돌로 높다랗게 지은 집은 치장이 화려하였으며, 일반인들의 차림새나 살림살이에서도 시골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18세기에 조선에서 가장 번성한 지역인 수도권에 거주하던 박지원이 청나라의 변방 도시인 책문(柵門)에서 목격한 풍경은 자존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였다.

책문 밖에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여염집들이 모두 높다랗고 대개 기둥이 다섯인 집이다. 이엉으로 집을 이었으나 용마루가 높이 솟고 문호(門戶)가 번듯하며, 거리는 곧고 판판하여 먹줄을 친 것 같다. 담장은 모두 벽돌을 쌓았고, 거리에는 사람을 태운 수레, 짐을 실은 수레가 오간다. 벌여 둔 그릇은 모두 그림을 그린 꽃 사기로 일반 풍물이 하나도 시골티가 없어 보인다.

예전에 내 친구 홍대용에게서 중국 문물의 성대한 규모와 세밀한 심법(心法)을 들은 적이 있지만, 오늘로 보아 책문은 중국의 동쪽 끝 벽지(僻地)인데도 오히려 이 정도인데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였 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 같이 후끈한 느낌이 들었다.228)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 27일.

조선 사신단의 여행 경로로 볼 때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박지원은 이곳을 보자마자 청나라의 번영과 조선의 가난함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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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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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한 박제가에게 중국의 도시는 지상의 낙원처럼 보였다.

말은 문자와 같고, 집은 금빛이며, 통행하는 것은 수레이고, 냄새는 향기롭다. 그 도읍과 성곽에는 생황(笙簧)의 노랫소리가 가득하고, 무지개다리와 푸른 숲 속을 은은하게 오가는 풍경은 완연히 그림과 같다. 부인네도 모두 옛날의 머리 모양과 긴 저고리를 입고 있어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는 것이, 우리나라 부인네의 짧은 저고리, 폭 넓은 치마가 아직 몽고의 제도를 답습하는 것과는 다르다.229)박제가, 『북학의외편』, 북학변(北學辨).

박제가에게 청나라의 문물은 모두 찬탄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번쩍이는 건축 장식, 수레로 북적이는 거리, 게다가 거리에는 음악 소리가 들리고 향내까지 넘쳐 났다. 박제가는 조선인이 중화 문화의 상징이라 자랑하였던 의복 제도에서도 청나라의 제도를 칭찬하였다. 부인네의 복식(服飾)을 볼 때, 조선의 복식은 몽고의 제도를 답습한 오랑캐 문물인 반면에 청나라의 복식은 중화 문물이라는 것이다. 박제가로서는 청나라에 견줄 만한 조선의 문물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지식인들도 번성하는 도시의 풍경을 목격하였다. 17세기에 일본을 방문한 경섬(慶暹, 1562∼1620)은 도로가 잘 정비된 가운데 집이 즐비하며, 시장에는 파는 물건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거리는 반듯하고 여염집은 즐비하며 시장에는 물화(物貨)가 쌓여 있다. 중국, 남만(南蠻), 남반(南般), 유구(琉球) 등의 나라와 서로 물화를 유통시키는데 아무리 먼 곳이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관동(關東) 지역의 여러 주와 석견(石見), 단후(丹後), 장문주(長門州)는 금과 은을 많이 생산하고, 중국의 동전을 가져와 시장에서 사용한다. 이 때문에 상인들이 사방에 운집하고 국내가 부유하며, 시장 점포의 제도는 중국과 같다.230)경섬(慶暹), 『해사록(海槎錄)』 하권, 1607년 윤6월 26일.

18세기에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오사카(大阪)에서 통신사 행렬을 구경나온 수많은 시민을 보았다. 그런데 구경나온 남녀노소 모두의 복식과 치장이 너무도 화려하여 부유함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관광(觀光)하는 남녀들이 양쪽에 담처럼 늘어섰는데, 모두 비단옷을 입었다. 여자는 검은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꽃 비녀에 대모(玳瑁) 빗을 꽂고, 연지와 분을 바르고, 붉고 푸른 채색 그림의 긴 옷을 입고, 보배 띠로 허리를 묶었는데, 허리는 가늘고 길었다. 멀리서 보기에 불화(佛畵)와 같았다. 수려한 남자아이는 복색과 단장이 여자보다도 더 예뻤다. 나이 8세 이상만 되면 보배 칼을 왼쪽 옷깃에 꽂지 않은 자가 없었고, 강보(襁褓)에 있는 어린아이도 모두 구슬과 옥을 감고 무릎 위에 안겨 있거나 등에 업혀 있었다. 그 모습이 일천 수풀에 붉고 푸르고 누런 꽃 일만 송이가 피어 있는 것 같았다.231)신유한(申維翰), 『해유록(海遊錄)』 상권, 1719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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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 구경 인파
통신사 행렬 구경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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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번영이 상업 및 무역의 활성화에 있고, 경제 수준이 조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일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문보다 무예를 숭상하고, 머리 모양이 이상하며, 옷차림새가 판이한 일본을 문화 국가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일본의 번영이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정교한 기술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옛날에는 외방(外方)의 오랑캐들이 자제(子弟)를 중국에 보내 입학시킨 자가 매우 많았다. 근세에는 유구국 사람이 중국의 태학(太學)에 10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문물과 기능만을 배워 갔으니, 이는 『지봉집(芝峯集)』에 나오는 말이다. 일본 사람 역시 중국의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을 왕래하면서 각종 기술자의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만을 배워 오기에 힘썼다. 따라서 유구와 일본은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기능은 중국과 대등하게 되어, 백성들은 부유하고 군대는 막강하여 이웃 나라에서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미 그렇게 된 효과가 이러한 것이다.232)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기예론(技藝錄)3.

정약용의 예에서 보듯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번영이 중국의 강남 지역과 무역을 하고 중국의 정교한 기술을 배워서 습득한 데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현실은 어떠하였는가? 정약용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사람이 많아질수록 기술이 발달하는 법인데,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지 않아 생산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기술이 정교해지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기술이 더욱 공교(工巧)하게 되니, 이는 일의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골에 사는 사람은 기술자가 있는 중소 도시에 사는 사람만 못하고, 중소 도시에 사는 사람은 기교가 있는 이름난 성이나 큰 도시에 사는 사람만 못하며, 이름난 성이나 큰 도시에 사는 사람은 새롭고 기묘한 제도가 있는 서울에 사는 사람만 못하다. ……

우리나라에 있는 온갖 기술자의 기술은 모두 예전에 중국에서 배웠던 것이다. 수백 년 이후로 딱 잘라 버리고 다시는 중국에 가서 배워 올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의 신식 기술은 계속 늘어나 이미 수백 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서로 모르는 것을 묻지 않고 그저 예전의 것만으로 흡족하게 여기니, 어찌 그리도 게으른가.233)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기예론1.

조선의 지식인들이 조선 기술의 후진성을 언급할 때에는 바늘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이 문화 국가라 주장하는 근거는 예악의 실천에 있었고, 예악의 실천은 의복 제도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그런데 만약 바늘이 없으면 의복을 만들 수 없으므로 예악의 실천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마련인데, 당시 조선에서는 바늘을 제작할 기술이 없어 전량을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19세기에 이강회(李綱會, 1789∼?)는 만일 청나라가 바늘 수출을 중단한다면 조선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 기술의 낙후성을 비판하였다.

부인네의 일은 바늘의 도움을 받아야 이루어집니다. 동방 수천 리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의복은 어느 하나 바늘을 쓰지 않으면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바늘을 벼리는 장인이 있습니까? 만약 중국에서 하루아침에 사신의 교역을 금지하여 바늘 한 보쌈도 압록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할지 모를 것입니다. 의복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건 만드는 자는 망건을 만들지 못하여 온 나라 사람이 머리를 쌀 것이 없어집니다. 바늘조차도 이런 지경이니, 다른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지요.234)이강회(李綱會), 『운곡잡저(雲谷雜著)』, 「거설답객난(車說答客難)」.

바늘 같은 기초적인 생산 도구마저도 제작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제 상황은 명확해졌다. 조선은 실제적인 경제 수준에서 청나라는 물론이고 일본보다도 뒤처진 상황이었는데, 이는 생산 기술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선진적인 생산 기술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 지식인들은 바로 청나라 에 선진적인 생산 기술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청나라는 여진족(女眞族)이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였고, 조선을 침략한 원수의 나라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목격한 청나라는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문물은 이전부터 중국에 있었던 중화의 문물이었다.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그들이 가진 생산 기술이 조선보다 나은 것이고, 더구나 그것이 중화의 문물이라면 조선에서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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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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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는 부녀자의 일이라 할 수 있는 길쌈하는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청나라의 우수한 기술을 조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부녀자의 일이란 무엇인가? 길쌈하는 일이다. 무엇을 길쌈하는가? 누에, 삼, 모시, 칡, 목화 등을 길쌈하는 것이다. 이 지(志)에서는 길쌈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다시 그림 해설을 곁들여 밝혔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좋은 방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중국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길쌈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째서 중국에서 찾는가? 그 방법에 단점이 많기 때문이다.235)서유구(徐有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28, 전공지(展功志).

앞서 보았듯이 박지원은 청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인 책문을 들어서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박지원은 이내 청나라의 생산 기술을 꼼꼼히 관찰하고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선진적인 생산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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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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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1780년(정조 4) 6월 27일에 책문에 도착하였다. 그는 다음날인 6월 28일에 벽돌과 기와의 제조법을 주목하였고, 7월 15일에는 수레와 수리 기구, 농업과 수공업 기술에 대해 상세히 살폈다. 박지원이 관찰하기에 청나라는 모두 ‘○○차(車)’로 표현되는 기계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는 서양의 과학 기술서인 『기기도설(奇器圖說)』과 중국의 기술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잘 나타나는 것이었다.

밭에 물을 대는 것은 용미차(龍尾車)·용골차(龍骨車)·항승차(恒升車)·옥형차(玉衡車) 등이 있고, 불을 끄는 것으로는 홍흡(虹吸)·학음(鶴飮) 등이 있으며, 전쟁에 사용하는 수레는 포차(砲車)·충차(衝車)·화차(火車) 등이 있다. 모두 서양의 『기기도설』과 강희제(康熙帝)가 만든 경직도(耕織圖)에 수록되어 있고, 글로 설명된 것은 『천공개물』과 『농정전서』에 있다. 뜻있는 사람이 이를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이 극도로 시달리는 가난의 병을 얼마쯤 고칠 수 있을 것이다.236)박지원, 『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15일.

정약용에게도 청나라의 선진 생산 기술은 모두 조선이 습득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약용은 가장 기본적인 생산 기술이라 할 수 있는 농업 기술은 물론이고 베 짜는 기술, 병기 제조법을 도입해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궐과 성곽의 건축, 교통수단인 수레와 선박의 제조법까지 배워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농업 기술이 정교해지면, 차지한 토지가 좁아도 생산된 곡식은 많을 것이고, 힘을 적게 들이고도 곡식은 아름답고 충실할 것이다. 묵은 땅을 개간하고, 땅을 갈고,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곡식을 베어 거두고, 곡식의 껍질을 벗겨 키로 까불고, 절구에 찧고, 물에 반죽하고, 불을 때서 밥을 짓는 일에서 모두 편리함을 돕고 수고로움을 덜게 될 것이다.

직조(織造) 기술이 정교해지면, 소비되는 물질은 적어도 생산된 실은 많아지고, 힘들이는 시간이 매우 단축되면서도 천의 올이 섬세하고 결이 아름다울 것이다. 물에 담가 씻고, 실을 만들고, 실을 뽑고, 베를 짜고, 표백하여 물들이고, 풀을 하고, 바느질을 하는 일에서 모두 편리함을 돕고 수고로움을 덜게 될 것이다.

병기(兵器)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공격하고 찌르고 방어하고 운반하고 성을 쌓는 일이 모두 용맹함을 돕고 위기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의원(醫員)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맥을 살피고 증세를 살피며, 약의 성분을 분별하고, 사계절의 절기를 살피는 것에서 옛사람의 몽매한 점을 발견하고, 이전 사람들이 잘못한 것을 따지게 될 것이다.

온갖 기술자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궁실(宮室)과 기구(器具)를 제조하여 성곽과 배, 수레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튼튼하고 편리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 법을 다 터득해서 힘써 실행한다면,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해지며, 백성들이 풍족해져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237)정약용, 『여유당전서』 시문집, 권11, 기예론2.

조선의 지식인들은 실제의 사무 능력을 중시하는 가운데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자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청나라의 선진 생산 기술을 도입하자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 기술을 도입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개인의 자각이나 노력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국가 차원에서 청나라의 생산 기술을 조직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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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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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는 청나라에서 농기구와 농사 기술을 도입하여 중앙에서 시험한 다음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먼저 농기구는 청나라 요양(遼陽)에서 구입하여 서울의 대장간에서 똑같은 것을 제작해 보고, 실제로 성과가 좋으면 철이 생산되는 지역에 해당 기술자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방안이었다. 또 농사 기술에서는 서울 근처에 둔전(屯田, 국영 농장)을 설치하여 청나라에서 도입한 농법을 시험하며, 성과가 좋은 농법을 익힌 농민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다른 농민에게 전수시키는 방안이었다.

먼저 중국의 요양에서 각종 농기구를 무역하여 한양에 대장간을 개설하여 법식(法式)에 맞게 농기구를 단련하여 만듭니다. 쇠가 생산되는 먼 고을 에 관속(官屬)을 파견하여 나누어 만들게 하여 이익을 거두게 함으로써 농기구 제조 방법을 확산시킵니다.

농사법을 시험할 경작지는 많고 적고를 가리지 않고 한양 근처에다 마련합니다. 작은 경우는 100무(畝), 많은 경우는 100경(頃, 1경은 100무) 정도도 무방합니다. 그것으로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잘 아는 전문가 한 명을 한나라의 수속도위(搜粟都尉)와 같이 선발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합니다. 따로 농사꾼 수십 명을 파견하여 후하게 비용을 대 주고 전문가 한 명의 지휘를 따르게 합니다. 가을이 되어 수확할 때에는 한 해 농사의 잘잘못을 비교합니다. 그러기를 한두 해 하면 반드시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여러 도에 훈련을 거친 농사꾼을 나누어 파견하여 한 사람이 10명에게 기술을 전파하게 하고, 또 그 10명이 100명의 농사꾼에게 기술을 전파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238)박제가,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 농기(農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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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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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더욱 체계화된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공조 아래에 이용감(利用監)이란 전문 관청을 설치하고 매년 청나라의 생산 기술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정조가 주도하는 규장각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기기도설』에 수록된 각종 기계류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고, 박제가의 『북학의』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생산 기술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정약용은 이경무(李敬懋, 1728∼1799)를 통해 일본의 무기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었다.

별도의 한 관청을 설치하여 이용감이라 하고, 북학(北學, 중국에 가서 배우는 것)하는 것을 그 직분으로 한다. 제조(提調) 및 첨정(僉正) 2명은 수학에 밝고 익숙한 자를 골라 임명하고, 별제(別提) 2명은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시키며, 학관(學官) 4명은 사역원(司譯院)과 관상감(觀象監)에서 수학에 정통하고 중국어에 익숙한 사람을 2명씩 임명한다.

해마다 이들을 북경에 보내 돈을 가지고 방법을 찾고 후한 값으로 기구를 구입한다. 구들 놓기, 벽돌 굽기, 수레 만들기, 그릇 만들기, 철·구리 다루기, 기와·벽돌·자기의 제조, 무거운 것을 끌어당기고 들어올리기, 나무·돌 다듬기, 맷돌방아·물방아 찧기, 바람으로 맷돌 돌리기, 홍흡 학음의 제도, 농기구, 직기, 병기, 화기, 풍선, 물총, 천문 역법에 사용되는 기구 등 실용에 관계되는 기구는 모두 익히고 돌아와 이용감에 올리게 한다. 이용감에서는 솜씨 있는 기술자를 모으고 그 제도를 연구하여 시험 제조한다.

성과가 있는 자는 제조와 공조 판서가 살펴서 가장 우수한 사람은 감목관(監牧官)이나 찰방(察訪), 현령(縣令), 군수(郡守)를 제수한다. 그리고 큰 공이 있는 사람은 승진시켜 남한부사(南漢府使), 북한부사(北漢府使)로 임명하며, 그 자손을 등용한다. 이렇게 하면 10년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큰 성과가 있을 것이며,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가 강해져서 다시는 천하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것이다.239)정약용, 『경세유표(經世遺表)』 권2, 동관공조(冬官工曹) 사관지속(事官之屬), 이용감(利用監).

정약용의 방안은 이용감이란 관청을 설치하여 수학과 중국어에 능한 관리를 집중 배치시키고, 이들이 정기적으로 북경을 방문하여 생산 기술을 익히고 생산 기구를 구입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생산 기술을 익힌 이용감의 관리는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가지고 온 기구를 수도권에서 시험 제작하여 사용해 보고, 성과가 좋으면 이를 전국으로 확대 보급시키는 방안이었다. 그리고 실적이 좋은 관리에게 승진의 혜택을 부여하면 이들이 더욱 좋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분발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강회는 우수한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보수를 상향 책정하며, 이들을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여 기술력을 높이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는 도량형(度量衡)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고, 중국과 일본에서 각종 기계를 수입하며, 외국의 우수한 기술자에게서 금속 단련법을 습득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선진 생산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한 지식인은 박제가였다. 그는 조선인이 중국에 가서 생산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는 아예 생산 기술이 뛰어난 서양의 선교사를 조선으로 초청하여 그들의 기술을 직접 전수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중국의 흠천감(欽天監)에서 역서(曆書)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幾何學)에 밝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과 기술에 정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국가에서 관상감 한 부서의 비용으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관상감에 근무하게 하고, 나라의 우수한 인재를 그들에게 보내 천문의 운행, 도량형과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의 제도, 농업, 양잠업, 의약, 자연재해, 기후의 원리, 벽돌의 제조, 가옥과 성곽 교량의 건축, 구리와 옥의 채광, 유리를 굽는 방법, 수비용 화포를 설치하는 법, 관개하는 법, 수레를 통행시키고 배를 건조하는 방법, 벌목하고 바위를 운반하는 법, 무거운 것을 멀리 운반하는 방법을 학습하도록 조치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알맞게 쓸 수 있는 인재가 배출될 것입니다.240)박제가, 『북학의외편』, 병오소회.

이상에서 보듯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자각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의 선진 생산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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