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나라는 자동차와 선박의 생산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불과 200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에서 수레와 선박의 새로운 제조법을 들여와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직 자동차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등장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수레와 선박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수레와 선박을 활용하자고 하였을 때, 그들의 주장은 아직 선구적인 소수 의견에 불과하였다. 당시에는 사람이 이동할 때 주로 가마나 말을 이용하고, 물자를 옮길 때에는 소나 말에 등짐을 지우는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수레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은 도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도 않았다.
이처럼 도로가 정비되지 못하고 교통수단의 발달이 늦어지면 농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이들 물품이 생산된 지역 안에서만 머물고, 물품의 수요가 제한되면 일정량 이상의 물품 생산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또 생산자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일정 지역 안에서 필요로 하는 분량 이상을 생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이 늦어지고, 결국은 모두가 가난해지는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제가와 박지원은 수레를 사용하지 않아 농수산물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이에 따라 나타나는 부작용을 거론하였다. 산골에 사는 사람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맛보지 못하고, 서북 사람은 남쪽 지방에서 생산되는 귤을 보지 못하며, 바닷가에서는 밭의 거름으로나 쓰는 해산물이 서울에서 엄청나게 비싼 것이 모두 물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우리나라 두메산골에서는 풀명자나무 열매나 배를 담가서 그 신맛을 메주 대용으로 쓰는 자가 있으며, 새우젓이나 조개젓을 보고 이상한 물건이라 한다. 그 가난함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241)박제가, 『진소본북학의』, 거(車).
영남(嶺南)의 아이들이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關東)의 백성들은 풀명자나무 열매를 담가 장(醬) 대신 사용하며,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과 귤을 구별하지 못한다. 바닷가에서는 메기나 미꾸라지를 밭의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 오면 한 움큼에 1문(文)이나 하니 어째서 그렇게 비싼 것인가.242)박지원, 『연암집』, 거제(車制).
물자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물품 생산의 규모가 축소되기 때문에, 적은 자본으로도 특정 물품을 독점하여 큰 이익을 남길 수 있게 된다. 생산 규모에 비례하여 시장의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만 냥의 돈만 있으면 농산물, 해산물, 약재 중의 한 가지를 전량 구매하여 비축해 두었다가 물건이 없어져 값이 올랐을 때 내다 팔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시장의 규모가 그만큼 영세한 수준에 있었음을 강조한 말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지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를 못해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 대개 만 냥을 가지면 한 가지 물종(物種)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라면 배 전부, 한 고을이라면 고을 전체를 총총한 그물로 훑어 내듯 할 수 있지요. 육지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서 한 가지를 독점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됩니다.243)박지원,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野話).
그런데 물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결과는 가난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서적의 판매가 활발하지 않으면 지식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며 이는 결국 학문의 쇠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북경의 서점에서는 서적 매매가 활발한데, 조선에서는 상인이 책 하나를 가지고 몇 달 동안 사대부 집을 돌아다녀도 팔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내가 서사(書肆, 서점) 한 군데를 들어간 적이 있는데, 서사의 주인이 판매 문서를 뒤적이며 피곤에 지쳐 있으나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서쾌(書儈, 서적상)는 책 한 종을 옆에 끼고 사대부 집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어떨 때는 여러 달을 걸려도 팔지 못한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중국이 ‘문명의 숲’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44)박제가, 『북학의내편』, 고동서화.
이덕무도 서적의 무역이 원활하지 못하여 정보가 단절되는 현상을 언급하였다. 조선에서는 해상 무역로가 막혀 있어 서적이 희귀한데, 조선의 지식인들이 남명(南明) 정부의 동향을 제대로 몰랐던 것도 정보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닷길로 재화를 통하지 않기 때문에 문헌이 더욱 희귀하다. 따라서 서적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명나라 말기 세 왕의 사실을 몰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 고려 때는 송나라 상선이 해마다 왔는데, 그때 고려 국왕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였으므로 온갖 물건이 구비되었다.245)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3,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필담(筆談).
조선과 비교할 때 일본의 유통 사정은 너무나 달랐다. 국내 상업은 물론이고 국제 무역이 성행하여 시장에서는 온갖 물품이 넘쳐 나며, 중국의 강남 지역에서 서적을 구매하여 서점에는 없는 책이 없을 정도였다. 이강회는 일본이 원래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배워 간 나라인데, 이제는 무역을 통해 천하의 선박과 왕래하며 생산 기술이 날로 정교해져서 물품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왜인들의 문자는 애초에 우리나라로부터 배워 갔다. 그런데 그들의 제조법이 정교하고 온갖 물건이 문명의 수준에 이른 것은 우리가 어리석고 저들이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 나라에 근본적으로 과거용(科擧用) 문장을 쓰는 법이 없기 때문이요, 100년 이래로 나가사키(長崎)와 사쓰마(薩摩)에 천하의 외국 선박이 두루 왕래하여 온갖 화물과 기용(器用)을 서로 교역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보고 듣고 익숙해져서 나날이 정교한 상태로 진보하였기 때문이다.246)이강회, 『유암총서(柳菴叢書)』, 「제거설(諸車說)」.
이덕무는 일본의 겸가당(蒹葭堂) 주인은 3만 권이나 되는 서적을 소장하고 중국의 명사와 교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고상한 기운이 조선보다 나을 정도라고 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중국의 강남 지방과 통상하므로 명나라 말기의 옛 그릇이나 글씨, 그림, 서적, 약재 등이 나가사키에 가득 차 있다. 일본의 겸가당(蒹葭堂) 주인 목세숙(木世肅)은 3만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고, 중국의 명사와도 많은 교제를 맺고 있다. 문아(文雅)한 기운이 성대하여 우리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다.247)이덕무, 『청장관전서』 권63, 천애지기서, 필담.
조선의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형편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의 우수한 생산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진 농법과 농기구를 도입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우수한 기계를 도입하여 수공업 제품의 생산을 늘려도 이들 물품이 유통되어 판매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수레나 선박 같은 교통수단의 혁신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레는 육상 교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수레가 우리 역사에서 사용된 것은 매우 오래되었는데, 고구려시대의 벽화에서도 수레가 발견될 정도이다. 그러나 수레는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이동 수단으로나 이용될 뿐 일반인이 이동할 때나 물품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 다. 수레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우리나라의 지형에 산이 많아 수레가 다니기 어렵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783년(정조 7)에 북경을 방문한 홍양호는 수레의 실용성을 확인하고 수레를 사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수레를 이용하면 사람이나 말의 힘을 크게 절약하면서도 많은 물건을 실을 수 있으며,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수레가 다닐 수 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본 것을 말하자면 연경(燕京, 북경) 안에는 수레바퀴의 굴대가 서로 부딪히며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미천한 사람이나 가난한 아이가 아니면 대부분 수레를 타고 이동합니다. 연경에서 요하(遼河)까지 1,000여 리 사이에 수레가 연이어져 하나의 바큇자국을 찍어 놓은 것 같으며, 방울소리가 서로 들리는 것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관중(關中)·섬서(陝西)·사천(四川)·촉도(蜀道) 같이 험준한 곳이나 강소(江蘇)·절강(浙江)·민월(閩越)·광동(廣東) 같이 먼 지역에도 부유한 대상인이 끊이지 않고 왕래하기를 마치 집 앞의 뜰을 다니듯이 합니다. 이것은 모든 도시와 국가의 재화가 풍부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니, 수레를 사용하는 이익이 말보다 10배, 100배나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아홉 마리 이상의 말이 끄는 큰 수레는 말하지 않더라도, 통상 다니는 상업용 수레를 보면 한 수레의 멍에를 맨 것은 작은 말 대여섯 마리에 불과하지만 싣고 가는 것은 말 수십 필에 필적합니다. 심지어 작은 말 한 마리가 끄는 가벼운 수레라도 세 사람이 함께 타고, 외바퀴에 작은 끌채가 달린 수레는 한 남자가 뒤에서 밀고 다니니, 일은 반이지만 공은 배나 됨 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레는 먹이를 먹지 않는 말이요, 길을 가는 집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큰 쓰임이자 국가의 이로운 도구 중에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248)홍양호(洪良浩), 『이계집(耳溪集)』 권19, 진육조소(陳六條疏).
이강회는 수레가 조세를 운송하는 데 크게 유용함을 강조하였다. 당시 제주도에서 매년 조정에 바치는 공물의 양은 한꺼번에 100마리의 말을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수레 10대만 이용하게 되면 운송비를 3분의 1로 줄이고,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고통도 크게 경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탐라(耽羅)에서 조정에 바치는 물품이 한 해 100바리(駄)입니다. 탐라의 배가 달량포(達梁浦)에 정박하면 농가를 뒤져서 농민들을 징발하여 등을 내리치고 뺨을 후려갈기며 구불구불 줄을 지어 길을 따라 짊어지고 가게 합니다. 이때가 되면 모내기를 할 자는 모를 내지 못하고, 김을 맬 자는 김을 매지 못한 채, 담을 넘어 달아나 숲 속에 숨어서 당해야 할 욕된 일을 피합니다. 도호부(都護府)에 도착한 뒤에는 강진읍 한 고을로 계산하면, 짐 한 바리의 운반비가 2,500전으로 관례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100바리면 그 값이 얼마입니까. 국가에서는 대동미(大同米)를 쌓아 두었다가 값을 쳐서 주는데, 100바리에서 들어오는 값을 모두 합하면 거의 300여 관(貫, 3,000냥)에 이릅니다. 탐라의 공물로 인해 아래로는 백성들의 농사철을 이처럼 심하게 빼앗고, 위로는 국가의 경비를 이처럼 많이 소비합니다.
만약 수송에 드는 비용의 3분의 1을 덜어 수레 10대를 만들고 달량포의 진영에 두었다가 본진(本鎭)에서 한양까지 전담하여 수송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10년 동안 얻는 비용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 고을의 농민들이 모두 기뻐하며 춤을 추고 농사를 즐겨 편안할 테니 그 이익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249)이강회, 『운곡잡저』, 거설(車說).
홍양호나 이강회 외에도 수레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지식인은 많았다. 유수원, 김육(金堉, 1580∼1658), 이광려(李匡呂, 1720∼1783), 박지원, 박제가, 홍길주(洪吉周, 1786∼1841) 등은 모두 수레를 이용할 것을 주장한 지식인인데, 이들이 수레를 이용하자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수레를 사용하면 국가, 수령, 일반 백성이 지불하는 운송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둘째, 미곡과 소금을 비롯한 온갖 물자의 유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셋째, 물품 납부를 원활하게 하여 물자 수송의 과중한 고통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
넷째, 온갖 상품의 유통을 편리하게 함으로써 물가를 조절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수레를 이용하면 물자의 운송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유통을 원활히 하여 시장을 키우고 물가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지름길이었기에, 청나라의 수레 제도를 도입하여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수레가 육상의 교통수단이라면 선박은 물 위를 움직이는 교통수단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로가 주요한 교통로였고, 지방에서 납부한 공물은 대부분 선박에 싣고 수로를 따라 서울로 운반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선박은 사람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움직였기 때문에 수심이 깊은 먼 바다를 항해하지는 못하고 육지의 연안을 따라서 난 항로로 이동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수상에서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선박 제도를 개선하려고 할 때, 이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사신단이 북경을 방문할 때에는 육상으로만 이동하였다. 따라서 수레의 제도는 항상 목격할 수 있지만 선박을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본 을 방문하는 통신사의 경우에는 부산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갔고, 일본의 내해로 들어가면 일본 배로 갈아타고 이동하였기 때문에 선박의 제도를 살필 수 있었다. 실제로 통신사 중에서는 일본의 선박 제도를 도입하려고 시도한 경우도 있었는데, 1763년(영조 39)에 일본을 방문한 조엄(趙曮, 1719∼1777)은 동행한 사공(沙工)과 기술자에게 일본의 선박 제도를 꼼꼼히 살펴 모형을 만들게 한 후 이를 영남 통제영(統制營)에 보내 시험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은 수레와 마찬가지로 선박의 제도도 청나라에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일본보다 청나라의 제도가 우수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와의 공식 무역을 통해 선박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박제가는 먼저 청나라의 상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중국인에게 직접 선박 제도를 습득하자고 제안하였다.
연해의 섬에 거주하는 백성 가운데 물에 익숙한 사람을 모집하여 관원이 인솔하고 곡식과 돈을 소지하고 시장으로 갑니다. 등주(登州)·내주(萊州)에서 온 배들을 장연(長淵)에 정박시키고, 각종 해산물 을 선천(宣川)에서 교역하게 합니다. 장강(長江)·절강(浙江)·천주(泉州)·장주(漳州)의 물품을 실은 배는 은진(恩津)과 여산(礪山) 사이에 모이게 합니다. 그러면 영남의 면화, 호서의 모시, 서북 지역의 실과 삼베, 비단, 담요를 거래할 수 있고, 대나무 화살, 한지, 곤포(昆布), 전복 같은 물건을 금, 은, 물소 뿔, 병기, 약재와 교환할 수 있습니다. 또 선박·수레·가옥·집기 등 이로운 기구를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천하의 서적을 국내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의 풍속에 얽매인 선비들의 고루하며 좁은 견해가 깨트리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어질 것입니다.250)박제가, 『북학의외편』, 병오소회.
다음으로 박제가는 청나라 정부를 설득하여 조선 상인이 중국에 가서 교역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박제가는 청나라가 이미 일본, 유구(琉球), 안남(安南), 서양국(西洋國)에 무역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가 요청하기만 하면 청나라 정부는 무역을 허용할 것으로 보았다. 청나라의 교섭 국가 가운데 조선은 가장 우호적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조선 상인이 중국에 가서 무역할 때 솜씨가 좋은 기술자를 데려가 현지에서 중국의 선박 제도를 관찰하고 그대로 제조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장삿배를 외국과 유통시키려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된다. 일본인은 약삭빨라 늘 이웃나라의 틈새를 엿본다. 그렇지만 안남, 유구, 대만(臺灣) 같은 나라는 뱃길이 험하고 너무 멀어 그들 나라와 통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오직 중국밖에 없다.
중국은 태평을 누린 지가 100여 년이다. 우리나라가 공손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으므로 논리를 잘 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 유구, 안남, 서양의 나라조차도 모두 민(閩), 절강(浙江), 교주(交州), 광주(廣州) 등지에서 교역을 한다. 저 여러 나라들과 함께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의심하지 않고 허락하며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라 안의 재능이 빼어난 기술자를 모아서 선박을 만들되 중국의 선박 제조 기술을 채택하여 견고하고 치밀하게 만들기에 힘쓴다.251)박제가, 『북학의외편』, 「통강남절강상선의(通江南浙江商船議)」.
정약용은 조선 해안에 표류하는 선박을 이용하여 우수한 제도를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조선의 해안에 매년 청나라와 일본 배가 10여 척 표류하고 유구나 여송(品宋, 루손 섬)의 배도 가끔 표류하는데, 제도가 우수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외국의 표류선이 오면 이용감에서는 즉시 관리와 기술자를 보내 선박의 제도를 꼼꼼히 조사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선박을 제조하면 중국에 가서 제도를 배워 온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배 만드는 법은 이용감이 중국에서 배워 올 수 없는 것이며, 중국에 가르쳐 줄 것을 의뢰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 연안에 표류하는 중국과 일본의 배가 해마다 10여 척이나 되고, 유구와 여송의 배도 가끔 표류하는데, 그 제도와 모양이 기묘하고 견고하여 풍파에 출몰하면서도 파손되거나 침몰되지 않는다.
이런 배가 표류하면 즉시 이용감 관리를 보내되 수학에 밝고 솜씨가 좋은 기술자와 함께 검사하면서, 물품의 길고 짧음, 넓고 좁음, 뾰족하고 뭉툭한 것, 높고 낮음을 모두 상세하게 살펴서 그 치수를 기록한다. 또 선박의 재료, 유회(油灰)와 걸레로 배의 틈을 메우는 방법, 양쪽 날개에 판자를 붙이는 제도를 모두 물은 다음 이를 모방해 만들어서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게 한다. 이렇게 하면 중국에 가서 배워 온 것과 같다.252)정약용, 『경세유표』 권2, 동관공조, 사관지속, 수성사(修城司).
이강회는 강진 사람으로 정약용의 제자가 되었는데, 선박 제도에 관한 전문적인 글을 작성하였다. 이강회는 흑산도에 사는 문순득(文淳得)에게서 외국 선박의 제도에 관한 정보를 들었는데, 문순득은 바다에 표류하여 유구, 마카오, 중국, 필리핀 등지를 다니면서 서양 선박을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이강회는 ‘운곡선설(雲谷船說)’에서 조선 선박과 외국 선박의 제도를 비교하여 차이점을 말하였는데, 특히 외국 선박의 장점을 잘 포착하여 조선의 선박 제도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제시하였다.
(외국의 선박은) 취사실을 위층에 설치하고 여기에 의지하여 긴 난간을 만들며, 좌우에 작은 벽돌을 놓아 쌓는다. 위에는 나무틀을 놓고 솥을 걸며 유회(油灰)를 발라서 봉한다. 위의 휘장은 소가죽으로 만들고 가죽은 기름으로 처리하여 그을음에 물들지 않게 한다. ……
우리 선박은 취사실을 선박의 복판에 설치하고 투시(套柴)라 부른다. 밥을 짓는 사람이 연기를 내면 복판에 연기가 자욱하여 뱃사람들은 의복과 얼굴이 검정 귀신처럼 변한다. 복판 내부는 검게 그을려 비가 오면 젖었다가, 햇볕이 나면 얼룩이 지고, 바람이 불면 떨어져서, 매우 거칠고 더럽다. 더럽고 습기가 밴 아래에 있는 이 풍속을 누가 고칠 수 있을까.253)이강회, 『유암총서』, 「운곡선설(雲谷船說)」.
박제가가 파악하기에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난이었다. 그는 재물은 우물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재물을 소비하면 늘 새로운 재물이 나타나지만 소비를 멈추면 재물도 사라져 버린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생산과 소비가 위축되어 모든 사람이 가난해진다면 아무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될 것이 두려웠다.
재물이란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을 퍼내면 늘 가득하지만 길어 내기를 그만두면 물이 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고, 그로 인해 여인의 기술이 피폐해졌다. 이지러진 그릇 사용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부려 물건을 만드는 것을 숭상하지 않아, 나라에는 기술자와 목축, 도공의 기술이 형편없고, 기술도 사라졌다. 더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짓는 방법이 형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므로 상업 자체가 실종되었다. 사대부, 농업, 공업, 상업 네 부류의 백성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다.254)박제가, 『북학의내편』, 시정(市井).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 우수한 생산 기술을 도입하여 제품의 생산을 늘리고, 교통수단의 혁신을 통해 유통을 활성화하고 시장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육로와 해로를 통한 청나라와의 교역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품의 질과 양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