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2. 유학자들의 강학과 그 공간의 훼철
권오영

경기도 양근 벽계에서 태어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19세기 중반기를 살면서 외세의 침략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학문적 이론 정립을 위해 이학(理學)과 사학(史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주자학 이해의 집대성을 시도하고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춘추 사관(春秋史觀)에 입각한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여 역사서의 편찬을 계획하였다.

이항로는 1835년(헌종 1)에 문인 임규직(任圭直)에게 지어 준 시에서 주자학 탐구와 역사서 편찬의 뜻을 표현하였다.

주서는 우리나라 선비의 설을 모으고 싶고 / 朱書擬輯東儒說

역사서에는 원나라 황제를 깎아 버리리262)이항로(李恒老), 『화서집(華西集)』 부록(附錄), 권9, 연보(年譜). / 靑史行刪北帝編

이항로는 『주자대전』에 대한 종합적인 주석을 시도하여 송시열이 편찬한 『주자대전차의』를 계승하여 『주자대전차의집보』(70책)라는 방대한 주석서를 완성하였다. 또 그는 1846년(헌종 12)에 맏아들 이준(李埈)에게 명하여 『주자대전차의집보』에서 번다한 것을 버리고 요점을 모으고 자신의 안 설(按說)을 보충하여 『주자대전집차(朱子大全集箚)』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러한 『주자대전』에 대한 주석서의 정리는 조선 주자학 탐구의 찬연한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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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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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항로는 원나라가 참통(僭統)이고 정통(正統)이 아니며 위주(僞主)이고 진주(眞主)가 아니라는 역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서의 편찬을 기획하였다. 1852년(철종 3)에 그는 제자인 유중교(柳重敎)에게 명하여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이념이 강하게 내포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60권)을 편찬하여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리 정신을 표명하게 하였다. 이어 1863년(철종 14)에 김평묵(金平默)에게 명하여 이 책을 계속 편찬하여 마무리를 짓게 하였다.

이항로는 1850년(철종 1)에 강학 규정(講學規程)을 지었는데 그 강계(講戒)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북쪽 오랑캐(청나라)는 의관(衣冠)을 헐어 버렸고, 서양 귀신은 심술(心術)을 좀먹고 있으니 마땅히 몸을 빼내어 서서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 성현의 가르침과 부조(父祖)의 업(業)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유자(儒者)의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법문(法門)이다.263)이항로, 『화서집』 권31, 강규(講規), 여숙강규(閭塾講規) 강계(講戒).

이항로는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의 이론 정립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1857년(철종 8)에는 김평묵의 요청으로 서양을 배척하는 이론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그는 1863년(철종 14) 1월에 ‘벽사록변(辟邪錄辨)’을 지어 위정척사 운동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이항로가 76세가 되던 해에 김평묵은 스승의 글 중에서 정수(精粹)를 발췌하여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찬하였다. 그 뒤 『화서아언』(12권 3책)은 1874년(고종 11) 김평묵·유중교·양헌수(梁憲洙)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이항로 학맥의 위정척사 이념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위정척사 운동의 이념적 교재로 쓰였다. 이러한 이항로의 학문적 업적에 근거하여 이항로의 학맥을 이은 학자들은 개항 전후 일본과 서양 세력의 침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물리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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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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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의 학맥을 이은 학자들은 개항을 전후하여 『화서아언』을 지속적으로 강론하여 척사 이념을 확고히 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은 1895년(고종 32)에 제천의 자양 서사(紫陽書舍)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여 학파의 결속을 다졌다. 유인석 등은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추진되자 대규모의 학술 모임을 개최하고 어려운 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자양 서사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동문의 결속을 다지면서 의병 운동(義兵運動)을 계획하였다.

19세기 중반은 전국에서 민(民)의 소요(騷擾)가 일어나는 등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철종 연간(1849∼1863)에는 삼정(三政)이 극도로 문란하였다. 그래서 1862년(철종 13) 임술년에는 전국적으로 민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사대부가 수령(守令)과 감사(監司)가 되어 이(利)의 구멍을 보고 물이 들어 온갖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하면서 그 수는 다 셀 수도 없으니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모두 열거되어 있다고 하면서 임금께서 그 책을 구해다가 시험 삼아 읽어 보면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좀먹게 하는 실제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64)기정진(奇正鎭), 『노사문집(蘆沙文集)』 권3, 책(策), 임술의책(壬戌擬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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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 영당(紫陽影堂)
자양 영당(紫陽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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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진은 경사자집(經事子集)에서 백가(百家)의 책, 예(禮)와 악(樂), 병술(兵術), 수학, 천문, 지리에 이르기까지 탐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항상 말하기를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할 줄도 모르면서 입으로 성리(性理)를 담론하는 것이 우리나라 유학자의 큰 병통이다.”라고265)기정진, 『노사문집』 부록, 권1, 연보(年譜) 임자(壬子). 하여 공리공론적인 담론은 싫어하였다.

기정진은 ‘외필(猥筆)’,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등을 지었다. 그 중에서도 ‘외필’과 ‘납량사의’는 기호 학계의 학풍에 배치되는 주리적(主理的) 견해를 제출한 작품으로, 그는 스스로 앞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말하면서도 80 평생을 자리 밑에 넣어 두고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가 작고한 한참 뒤인 1902년(광무 6)에 기정진의 문집이 발간되자 그의 학설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266)전우(田愚)는 ‘외필변(猥筆辨)’, ‘납량사의변(納凉私議辨)’을 지어 조목별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이학(理學)의 학문적 성과는 조선의 유교 문화를 지키기 위한 이론적 탐구였다. 그는 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등 훌륭한 학자를 양성하여 큰 학단(學團)을 형성하였고, 이들에게 ‘외필’과 ‘납량사의’를 전수하여 조선 말 기에 무너져 가는 유교 문화의 재건을 위해 이(理)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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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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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서울·경기·호남 지역에서는 성리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풍이 크게 일어나고 있기도 하였다. 영남에서는 여전히 성리학에 매몰되어 있었다. 영남의 유학자들은 19세기에 이르면 더욱 학술 활동이 활발해진다. 이상정(李象靖)의 제자인 유범휴(柳範休)는 1812년(순조 12)에 고산 정사(高山精舍)에서 스승 이상정의 학덕(學德)을 기리면서 학술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를 이어 유치명(柳致明)은 호계 서원(虎溪書院)에서 학술 모임을 주도하여 그의 문인들이 장차 영남 학계의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해 나갈 사상적 이념을 학습하게 하였다. 한편 이한응(李漢應)도 오산당(吾山堂, 청량 정사(淸凉精舍))에서 영남 유림 6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학술 모임을 개최하여 영남에서의 학문적 위상을 크게 높이고 있었다. 이러한 학술 모임을 통하여 영남 유학자들은 19세기까지도 이황의 심성 이기론(心性理氣論)을 사 상적 기반으로 삼아, 그 기초 위에서 여러 주제에 대해 학술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학술 모임에서 주희(朱熹, 1130∼1200)의 ‘옥산강의(玉山講義)’와 『대학(大學)』, 『중용(中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강론을 통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 ‘경(敬)’, ‘이기 심성(理氣心性)’에 대하여 학습하고 토론하였다. 영남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다양한 명제에 대해 학술 토론을 통하여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학술 활동 공간은 1864년(고종 1)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으로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곧 전국의 사원(祠院)에 대한 훼철령(毁撤令)이 내려 1871년(고종 8)에 47개 사원만을 남기고 모두 훼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생들은 활동 근거지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이제 일제와 서양 열강의 진출은 더욱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교 문화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고 반정부·반외세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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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초상
흥선 대원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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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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