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3. 반외세 유학의 마지막 불꽃
권오영

19세기 외세의 거센 도전 앞에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유와 삶을 새롭게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현실에 대한 대응 양태는 서울과 지방의 유학자가 서로 달랐고, 그들이 각자 처한 사회적 처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곧, 서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기학(氣學)이나 동학(東學)으로 대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학(理學)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여 외세를 물리치느냐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다양하게 나타났던 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보아서도 그러한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서울과 기호, 영남 등 각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유학자들의 다양한 삶과 사유는 조선 유학자가 처한 최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학의 사유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학자는 경기의 이항로,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이었고, 기학의 사유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학자는 서울에서 평생을 보낸 최한기였다.

이항로는 경기도 양근의 벽계리에 있는 청화 정사(靑華精舍)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여러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주자대전』 등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런데 이항로의 학문과 명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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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생가
이항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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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는 1850년(철종 1) 1월부터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만들었다. 그는 노인이든 어린이든,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구애하지 않고 성심으로 강의를 듣겠다는 사람은 입학을 허락하였다. 그의 강의는 한 구절의 허투(虛套)나 가식(假飾)이 없이 아주 명쾌하였다. 특히 의리(義理)의 핵심을 말할 때는 사물을 가지고 비유하여 설명하여 어리석은 이들도 듣고 쉽게 이해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이론과 실천 정신을 배운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崔益鉉), 양헌수, 유인석 등 뛰어난 제자들은 개항 전후에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세기 중반에 위정척사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항로는 이미 1835년(헌종 1)에 ‘우탄(憂歎)’이라는 시를 지어 서양 세력의 확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오막살이집은 크기가 말만 한데 / 弊屋寬如斗

어찌타 만 휘나 되는 근심만 쌓였나 / 安儲萬斛憂

천지의 봄은 고요하기만 한데 / 乾坤春寂寂

밤에 부는 비바람은 쓸쓸하구나 / 風雨夜悠悠

흑수의 물결은 파란이 많이 일고 / 黑水波瀾濶

서양의 도깨비는 그윽이 숨어 있네 / 西洋鬼魅幽

동쪽 바다 오히려 얕지 않으니 / 東溟猶未淺

우리 도가 어찌 길이 끝나겠는가267)이항로, 『화서집』 권1, 시(詩), 「우탄(憂歎)」. / 吾道詎長休

이항로의 이 발언은 바로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등이 속한 이항로 학단의 위정척사 운동의 연원(淵源)이 되었다. 이항로는 안으로는 송시열의 정적(政敵)인 윤휴(尹鑴)의 정치적 계승자인, 실세(失勢)한 남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우려하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국내에 들어와 숨어서 세력을 키워 가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1836년(헌종 2) 무렵 이미 서양이 경제적·문화적 침략을 해 오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그는 서양이 그 술(術)을 전파시키는 것은 조선의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미혹시켜 널리 내응(內應) 세력으로 키운 뒤에 자신들의 욕구를 마음대로 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268)이항로, 『화서집』 부록, 권9, 연보 병신(丙申).

이항로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민심을 결속하여 외적을 물리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민심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없고, 한번 나누어지면 다시 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1866년 9월 12일에 천주교를 이단(異端)·사설(邪說)로 규정하고 서양 세력의 배척을 극력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국론(國論)을 서양을 물리치자고 주장하는 국변인(國邊人)의 설과 서양과 화친하자는 적변인(賊邊人)의 설로 파악하고 국변인의 편에 서서 서양을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면서 서울을 지키면서 전쟁을 하자는 주장인 전수설(戰守說)과 도성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인 거빈설(去邠說)로 나누고, 당시 현실로는 전쟁을 하자는 주장이 떳떳한 도(道)요, 도성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은 임기응변(臨機應變)의 도라고 하여 지금은 성인이 아니면 임기응변의 도를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전쟁설을 주장하여 국론을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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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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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는 이를 위하여 국왕이 교서(敎書)를 발표하고 외적의 침입 연유 및 선후책(先後策)을 명백히 하여 민심을 진작시킬 것, 삼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 외에도 언로(言路)를 넓혀 여론을 들을 것, 장수를 선발하여 무비(武備)를 갖추고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 각 도에 명망이 있는 군소사(軍召使)를 파견하여 충의(忠義)와 기절(氣節)이 있는 인사를 모아 군대를 편성하고 관군에 협력하게 할 것, 국왕 스스로가 정치 및 사생활에서 모범을 보일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항로는 구체적으로 경복궁 건설 등 토목 공사의 중지와 사치 풍조의 제거 등을 주장하는 국가 보전책을 상소하였다. 특히 그는 경복궁 중건의 토목 공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양적(洋賊)’이 국내에 미친 듯이 설치는 이유를 조선 백성의 내응(內應)에서 찾았다. 그리고 조선 백성의 내응은 민심의 원망과 이반에서 말미암고 민심의 원망과 이반 은 일정한 산업의 고갈에서 말미암고, 산업의 고갈은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그치지 않음에서 말미암고, 가렴주구가 그치지 않음은 토목 공사를 크게 실시하는 데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그는 원망에 가득 차 있고 흩어진 백성을 몰아서 군졸에 충당하여 전쟁에 동원하려고 하면 진실로 어려운 일이라고 하고, 이러한 일을 계속한다면 같은 배를 탄 사람도 모두 적국(敵國)이요, 궁궐 담장 안도 모두 적지(敵地)일 테니 어찌 ‘양적’의 근심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269)이항로, 『화서집』 권3, 소차(疏箚), 「사동의금소(辭同義禁疏)」 10월 초3일.

이항로는 이른바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는 것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은데 서양 물건이 가장 심하며, 그것들은 기이하고 음란한 기계로써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더욱이 서양의 재화(財貨)는 손으로 생산하는 공산품(工産品)으로 하루의 계획으로도 풍족한 것임에 비하여 우리의 재화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한 해의 계획으로도 부족한 현실인데, 부족한 것으로 남아도는 것을 교역한다면 우리 국가의 경제가 장차 곤궁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270)이항로, 『화서집』 권3, 소차, 「사동의금소」 10월 초3일.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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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초상
최익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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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항로의 견해는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등이 잘 계승하여 나아갔다. 최익현은 1876년(고종 13) 1월에 도끼를 메고 대궐에 나아가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최익현의 상소와는 별도로 김평묵과 유중교의 학통을 이은 유인석, 홍재귀(洪在龜)·유기일(柳基一) 등 50명의 유생은 개항 당시에 연명(聯名)으로 소(疏)를 올려 개항을 반대하였다. 연명 소유(疏儒)들은 상소에서 왜(倭)와 양(洋) 이 일체(一體)라는 것을 주장하여 왜를 물리치는 것이 곧 양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이항로의 학맥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실에 대응하는 새로운 모색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항로의 문인 중에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는 평안도 태천(泰川)에서 유학을 강론하였다. 그 문하에서 공부한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조선 역사의 연구와 독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은식은 주자학자에서 사상적 전환을 통하여 양명학(陽明學)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이항로의 제자 유중교와 김평묵의 문하에서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인 고석로(高錫魯)가 공부하여 위정척사 사상을 지녔다. 그는 황해도 지역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그들은 주로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운동에 투신한 성리학자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구(金九, 1876∼1949) 등이 배출되어 민족 독립 운동과 민주 국가 건설에 몸을 바쳤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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