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4. 영·호남 유학자의 사유와 실천적 삶
권오영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서원 훼철과 1876년 개항 이후 전개된 개화(開化)의 도도한 흐름은 영남 유림(儒林)을 학술 모임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고, 이제 자신들의 생활 근거지를 고수하고 반개화(反開化), 반외세(反外勢)의 투쟁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영남 유림이 잦은 상소 운동이나 의병 투쟁을 전개한 것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학연과 영남이라는 지연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대규모 학술 활동을 통해 다진 학문적 저력(底力)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영남에서 전개된 위정척사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원의 사액(賜額)을 받거나 훼철된 서원의 복설(復設)을 청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개화파 정권에 대한 비판과 일본·서양 등 침략 세력에 대한 배척이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이 ‘위정’을 대표하는 것이었다면 정권에 대한 비판과 외세에 대한 배격은 ‘척사’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위정척사는 곧 그들의 사유와 삶을 지키기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었다.

19세기 영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는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다. 그는 주희와 이황 학문의 핵심이 ‘주리(主理)’ 두 글자에 있다고 생각하였 다. 그는 자기의 집 이름으로 운곡(雲谷, 주희)을 이어 받고 퇴도(退陶, 이황)를 법으로 받는다는 의미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고 명명하여 주리의 학문을 잇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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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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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이후 영남 지역에는 이진상이 심을 곧 이로 보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제창하여 성리 학설에 있어 영남 학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 심즉리설은 심이 이기를 합하고 있다는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이나 심이 곧 기라는 심즉기설(心卽氣說)을 비판하고, 심의 본체(本體)를 강조하고 또 심이 이의 주재(主宰)라는 이해 위에서 19세기 중엽 이후에 제창된 이진상의 독자적인 학설이었다. 이러한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곽종석(郭鍾錫) 등이 충실히 계승하였는데, 그 학설은 주기론이 풍미하는 당시 학계에 주리론으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창된 것이었다.

이러한 이진상의 이학은 개항과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제창되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그는 주자학에 근거를 두되 간명하고 평이한 주리론으로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론은 이황의 학설에 배치된다고 하여 잠시 이단으로 몰렸고 상주 향교(尙州鄕校)에서 그의 문집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승희(李承熙)와 제자 허유(許愈), 곽종석 등이 변론을 하여 1916년에 도산 서원에서 비로소 이황의 학설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규정하였다. 곽종석이 1919년 파리 장서(巴里長書)의 대표로 전국 유림의 통합을 주도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게 된 사상사적 배경에는 이진상의 주리 중심의 이학이 있었다.

호남의 유학자 기정진 역시 이(理)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이를 따라서 발하는 기는 기발 (氣發)이 곧 이발(理發)이고 이를 따라서 가는 것은 기의 행(行)이라도 곧 이가 가는 것이다. 이는 조작력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그 움직임은 분명히 기의 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발(理發)·이행(理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기의 움직임은 실상 이에게서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명령하는 자가 주인이고 명을 받는 자가 종인 것과 같은 관계이다.”라고271)기정진, 『노사문집』 권16, 잡저(雜著), 외필(猥筆). 하였다. 기정진은 그의 주요 논문인 ‘외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발(理發) 두 글자는 오늘날 학자들이 크게 꺼리고 있다. 그들의 글을 보면 변화를 행하고 조리를 이루는 것을 기라고 한다. 누가 “주장하느냐?”고 물으면, “그 기(機)가 저절로 그러할 뿐이니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자가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이(理)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것을 타고 있다고 말한다. 애초부터 이가 그렇도록 시키는 묘(妙)가 없고 게다가 조종할 힘도 없다면 깃들어서 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있어도 도움이 되는 바가 없고 없어도 빠지는 바가 없다면 살에 붙은 혹이나 말 등에 붙은 등에에 불과하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는가.272)기정진, 『노사문집』 권16, 잡저, 외필.

또한 기정진은 ‘납량사의’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장하였다. 그는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자가 이(理, 理一)와 분(分, 分殊)에 어두워 이일(理一)을 형기(形氣)를 떠난 곳에 국한하고 분수(分殊)를 형기를 따른 뒤에 국한하여 이와 분이 간격이 생겨 성(性)을 논하는 것이 비로소 천하에 찢어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理)가 체(體)가 있고 용(用)이 없는 물건이 되었고 천지 사이에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은 기가 주가 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이항로가 이(理)가 주(主)가 되어야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하였듯이 기정진도 이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기정진은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천하의 큰 변고(變故)로 옛날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지금은 기가 이의 자리를 빼앗으니 기가 이의 자리를 빼앗으면 저 세 가지의 변은 차례대로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납량사의’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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