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5. 새로운 유교 사유와 유교 문화의 창신
  • 새로운 유학의 선언, 기학의 제창
권오영

1860년대에 최제우(崔濟愚)는 서학(西學)에 대응하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東學)을 새롭게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선교(仙 敎)와 서학의 천주(天主) 등이 교리 속에 스며 있으나 기본적인 사유와 삶의 구조는 유학의 새로운 변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동학에 의해 인간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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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초상
최제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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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와 동시대에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한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동서 문명의 교섭과 충돌이 일어났던 19세기에 세계사적 지식 정보를 지니고 새로운 유교적 사유와 삶의 체계를 세웠던 학자였다. 그는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소통과 화합을 목표로 새로운 유학, 곧 ‘기학(氣學)’을 제창하였다. 그는 1850년대에 서울의 상동(尙洞)에서 기화당(氣和堂), 양한정(養閒亭), 장수루(藏修樓), 긍업재(肯業齋) 등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24명의 노비의 도움을 받아 학자로서 안락한 삶을 살았다.

최한기의 일생은 독서와 저술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 좋아하였고, 기서(奇書)를 구하면 잠을 자지 못하고 읽고 또 읽었다. 당시 그는 청나라 연경에서 새로 들어오는 책은 거의 다 구입하여 읽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 자의 원고를 써 내려갔고 누가 옆에서 잘못 썼다고 지적해 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쳤으며, 누가 공부에 대해 질문하였을 때 하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였다.

일생 저술에 힘쓴 최한기는 서울의 숭례문 근처에서 생활하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 사람들의 생애와 일상적인 업무를 자기 학문의 자료로 삼았다. 그는 변화하고 있는 자연, 곧 하늘에 떠 있는 해·달·별과 서울의 사방에 펼쳐져 있는 천보산(불암산)·수락산·인왕산·와우산의 사시사철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때때로 책을 읽어 지식을 배양하고, 뜻있는 벗을 집으로 초대하여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그의 행복한 삶의 모습은 ‘양한정기(養閒亭記)’에 잘 표현되어 있다.

최한기는 교육과 학문을 평생 종사해야 할 일로 생각하였고, 몸소 이를 실천하였다. 그는 자기 학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여 의리(義理)에 합당하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학문이나 제도를 제창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천금을 아끼지 않고 동서고금의 서책을 구입하여 연구실에 쌓아 놓고 연구에 몰두하여 저술을 통하여 후학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는 그의 저술 곳곳에서 “앞사람이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자부하였다.273)최남선(崔南善), 『조선 상식 문답 속편(朝鮮常識問答續篇)』 제13, 도서(圖書), 동명사(東明社), 1947.

사실 최한기가 살던 시기에는 서학에 대한 탄압이 잇따랐고, 서학 연구는 철저히 통제를 받았다. 이에 최한기는 서학의 종교적 측면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오직 학술적 연구에만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는 1836년(헌종 2) 34세에 이미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을 써서 기(氣)의 체(體)와 용(用)을 논하여 동서남북을 소통시키려고 하였다. 이 두 책은 『기측체의(氣測體義)』라는 이름으로 북경에서 간행되어 세계 학계에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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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지략』
『영환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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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는 1850년대 말에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영환지략(瀛環志略)』을 분석하여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세계의 윤리 도덕과 정교(政敎)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여 『지구전요(地球典要)』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계 각국의 견문과 실험 결과를 혼자 힘으로 집성하여 『기학(氣學)』을 저술하여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이름하고 이를 온 세계의 뜻있는 지식인들이 널리 익히고 전파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는 1851년(철종 2)부터는 『인정(人政)』의 편찬을 구상하여 주제를 정하고 자료의 분류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인정』에서 그는 자연·사회·인간의 문제를 총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최한기는 1850년대에 기를 설명하는 구조에서 음양과 오행의 틀을 완전히 버렸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음양이라든가 오행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리고 공(空)과 허(虛)의 개념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그는 서학 관련 책을 베낄 때에 ‘공(空)’이란 글자가 있으면 이를 다른 글자로 바꾸어 버렸다. 또 그에게는 국가와 인종의 차별 의식이 사라지고 각국의 정치 제도와 풍속을 인정하게 되어 자연히 ‘화이(華夷)’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졌다. 실제 그가 『해국도지』 등에서 ‘이(夷)’ 자나 ‘만(蠻)’ 자를 인용할 때 모두 ‘인(人)’ 자로 고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최한기는 1850년대에 기학을 제창하여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을 널리 자각하게 하고(普覺群生) 서로 화합하며 살아가는(兆民有和) 영원한 인류 평화를 자기 서재인 기화당에서 꿈꾸면서 새로운 유교 문명의 세계를 그려 보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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