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6장 유교적 사유 양식의 고수와 근대적 전환
  • 5. 새로운 유교 사유와 유교 문화의 창신
  • 유교 문화의 비판적 창신
권오영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조선 유학계는 현실 인식에 대한 차이와 성리설에 대한 논쟁으로 각 학파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전우(田愚, 1841∼1922)의 학통과 이항로-김평묵의 학통에 속한 유학자들은 같은 기호 지역에 학문적 기반을 두면서도 학설과 현실 인식에서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또 영남 유학계에서도 이진상의 ‘심즉리설’이 이단으로 규정되어 20세기 초까지도 유림의 통합은 매우 어려운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 유학자의 사유와 삶은 개화 운동의 진전과 함께 서서히 변모하였다. 이미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그들의 근거지는 일거에 사라졌고, 의제(衣制)의 변통을 통해 예전보다 간편한 옷을 입게 되었다. 1866년(고종 3)과 1876년(고종 13)에 서양과 일본의 군인들은 양복(洋服)을 입고 화륜선(火輪船)에 대포를 싣고 강화도 연안에 나타나 문호 개방(門戶開放)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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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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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개화의 흐름은 지속되어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청년 지식인들은 유교의 개혁을 거론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비롯하여 구미의 새로운 문명에 눈을 돌렸다.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은 1880년(고종 17)에 일본에 가서 서양의 문물을 간접 경험하였고, 영선사(領選使)는 청나라의 톈진(天津)에 가서 신문물을 익혔다.

한편 민영익(閔泳翊) 등은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건너가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직접 접하고 돌아왔다.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척사와 개화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였지만, 이듬해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에는 척사 운동이 수그러들고 개화의 흐름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개화의 흐름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다시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그 중심에는 서양 선교사(宣敎師)의 역할이 컸다.

1894년(고종 31)에 고려 광종대부터 천여 년간 유교 정치와 유교 문화의 주요 근간이 되어 왔던 과거제(科擧制)가 폐지되자 이제 유교 경전을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세계 역사와 지리, 정치, 경제, 자연 과학 계통의 교육을 받아야만 관료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자 구학(舊學)과 신학(新學)의 갈등이 한동안 증폭되었다.

그런데 유교적 삶의 변화는 옷과 갓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 11월 에 내린 단발령(斷髮令)은 유학자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사실 그들은 신체와 머리카락에 대한 훼상(毁傷)을 부모에 대한 불효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상투가 하루아침에 잘리게 되자 이제 그들이 착용하던 옷과 갓이 필요 없게 되었다. 유학자들은 단발령을 유구한 조선의 문화를 끊어 놓는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학자들은 한결같이 전통 문화와 유교적 가치관의 파괴를 우려하였다. 그래서 최익현은 자기의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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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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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유교 관료는 물론 재야의 유학자들은 완고(頑固)한 태도로 ‘구학’을 고수하고 ‘신학’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장지연(張志淵) 등 개신 유학자(改新儒學者)들은 신문을 통하여 재야 유학자를 비판하였고 당시 재야의 대표적 유학자인 전우는 장지연을 강하게 비난하였다.274)전우, 『간재사고(艮齋私稿)』 권37, 잡저(雜著), 화도만록(華島漫錄), 장지연신문(張志淵新聞) ; 전우, 『간재사고후편(艮齋私稿後編)』 권20, 잡저, 화도만록, 장지연신문.

20세기 초 조선 유교는 완고를 고수하는 유학자들을 계몽시켜 ‘신학’을 배우게 하고, 아울러 일제가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책동을 분쇄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유교계에 몸담고 있던 장지연·박은식 등 개신 유학자들은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교도 새롭게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유교계가 분열되고 쇠미한 상황에서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왕양명선생실기(王陽明先生實記)』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지어 유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특히 박은식은 1909년 3월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제1권 제10호에 ‘유교구신론’을 게재하였다. 그는 유교계의 세 가지 큰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교를 개혁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75)박은식이 제기한 유교의 삼대 문제(三大問題)에 대해서는 신용하,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양명학론, 대동사상」, 『박은식의 사회 사상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86 참조. 그는 첫 번째로 유교파의 정신이 전적으로 제왕(帝王) 편에 있고 민중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맹자(孟子)가 민(民)이 중하다고 한 말을 거론하여 맹자의 학설을 확대하여 나가 인민 사회에 보급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두 번째로 공자(孔子)가 천하를 순회하면서 천하를 유교로 바꾸려고 한 주의(主義)는 강구하지 않고 그동안 유교를 전파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점을 지적하였다. 세 번째로 조선 유교는 간이(簡易)하고 직절(直截)한 양명학은 버려두고 지리(支離)하고 한만(汗漫)한 주자학을 숭상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박은식은 서양의 종교계를 보면 로마 구교 시대에는 암흑시대였는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대담과 열혈로 종교 개혁(宗敎改革)을 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하면서 유교 개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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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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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은 주자학은 너무 번거로워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간단(簡單)하고 절요(切要)한 양명학으로 유교 문화를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통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이론보다는 실천을 강조하여 유교를 양명학에 의거하여 새롭게 혁신하려고 하였다. 그는 양명학은 활학(活學)이고 사업에 필요한 학문이라고 하면서 양명학이 밝혀지지 않으면 사기(士氣)가 살아나지 못하고 청년의 사업심(事業心)이 진흥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276)박은식(朴殷植), 『박은식 전서(朴殷植全書)』 하(下), 서(書), 여위암서(與韋庵書).

또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유교의 역사적 변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부패한 유교를 비판하며, 새로운 유교적 사유와 삶을 정립해 보려고 하였다. 그는 이제 세상이 변하여 학술도 새롭게 일신되었다고 하면서 철학, 물리, 화학, 정치, 법률 등 신학이 새롭게 등장하였는데, 오직 구학을 힘쓰는 일파는 시대의 변천에 어둡고 신학과 구학을 참조하여 변통할 줄 모르니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277)장지연(張志淵), 『장지연 전서(張志淵全書)』 8, 만필(漫筆), 고재만필(古齋漫筆), 여시관(如是觀)(11) ;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년 1월 9일자(2778호).

장지연은 유교의 개신을 주장하면서 유교의 이상을 ‘대동사상(大同思想)’으로 보았다. 그는 대동의 교(敎)는 진화(進化)만을 쓰고 보수(保守)는 쓰 지 않았으며, 평등(平等)만을 쓰고 전제(專制)를 쓰지 않았으며, 겸선(兼善)만을 쓰고 독선(獨善)을 쓰지 않았으며, 강립(强立)만을 쓰고 문약(文弱)을 쓰지 않았으며, 박포(博包)만을 쓰고 단협(單狹)을 쓰지 않았으며, 지성(至誠)만을 쓰고 허위(虛僞)를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동사상의 6대 정신, 곧 진화·평등·겸선·강립·박포·지성은 장지연 유교관의 근본이 되는 이상론이었다.278)최영성, 「장지연의 유교관과 『조선 유교 연원』」, 『한국 유학 사상사(韓國儒學思想史)』 5 : 근현대편, 아세아 문화사, 1997 ; 장지연, 조수익 옮김, 『조선 유교 연원』, 솔, 1998,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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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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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은 우리나라가 천 년 동안 유교를 신앙으로 믿어 왔는데, 자기가 살고 있는 당대는 이제 유교를 새롭게 혁신하여 시의(時宜)에 합당하게 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제 그는 신학을 일으켜 자강(自强)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79)장지연, 『장지연 전서』 8, 논설(論說), 국가빈약지고(國家貧弱之故) : 『대한 자강회 월보(大韓自强會月報)』 제7호. 그는 종교의 자유 신앙은 진실로 훌륭한 일이지만, 일정한 국교(國敎)가 없고 각자 분열하여 서로 배치되면 민족의 통일 관념이 결핍될까 두렵고, 또 외국을 숭배하는 풍조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였다.280)장지연, 『장지연 전서』 8, 만필, 고재만필, 여시관(8) : 『매일신보』 1915년 1월 5일자(2775호). 그는 유교적 사유와 삶의 새로운 혁신을 통해 민족의 사상적 분열이 어느 정도 통합되기를 바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교 문화는 많이 변질되고 퇴색되어 갔다. 고려 멸망의 원인을 마치 불교로 돌렸듯이 조선 망국의 원인은 유교가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유교의 학문적 이론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천도교나 기독교의 세력 확장과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유교 의례(儒敎儀禮)는 점차 사라져 갔다. 광복 후 아직 농촌에서는 전통적인 유교 의례가 일부 계승되기도 하였으나, 도시에서는 유교 의례가 간소화되고 서구 의례의 영향으로 변질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부터 산업화·도시화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유교 의례는 서구의 기독교 의례와 혼효(混淆)되기도 하여 본래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의 오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이 많이 사라졌다. 이 무렵 유교 문화의 꽃을 상징하는 의례도 많 이 정비되었다. 1969년 1월 16일에 ‘가정의례 준칙(家庭儀禮準則)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시행되다가 1973년 5월 17일에 대통령령 제6680호로 ‘가정의례에 있어서 허례허식(虛禮虛飾)을 일소하고 그 의식 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 기풍을 진작한다.’는 취지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가정의례에 관한 시행령’ 및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시행 세칙’, 그리고 ‘가정의례 준칙’ 등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2003년에는 ‘건전 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현재 시행하고 있다. 가정의례는 혼례·상례·제례·회갑연 등을 말하는데, 특히 상례와 제례에서, 우선 상례에서는 굴건제복(屈巾祭服)의 착용과 만장(輓章)의 사용 등을 규제하였다. 그리고 상례의 장기(葬期)는 삼일장(三日葬)을 원칙으로 하고, 상기(喪期)는 부모·조부모·배우자를 위해서는 100일로 정하였다. 제례에서 기제사(忌祭祀)는 2대조까지, 연시제(年始祭)와 절사(節祀)는 추석에 직계 조상을 지내도록 하였다. 이 법률과 그 시행령·준칙 등은 그 뒤 여러 차례 개정되어 시행되어 오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아직 상례나 제례를 유교 의례로 치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단, 성균관과 향교, 서원 등에는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유교 의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의 시대에 맞게 예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본래 유교의 근본정신이고 보면, 옛날에 얽매이거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교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의 예를 법도로 삼되 오늘의 우리 시대에 맞게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현대의 예 문화를 창조해 나가되 법도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시중(時中)’의 도리를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그 의미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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