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1. 음악 만들기의 의미
권오성

음악의 역사는 창작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정된 상황에서 음악의 역사를 창작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한 한정된 상황은 창작에 관한 어휘 해석상의 문제를 말한다. 음악에서의 창작이라는 것은 작곡(作曲, composition)을 뜻하는데,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를 작곡이라 말한다. 또 작곡이라는 어휘가 비서구 문화권에서는 여러 개념으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 요약하면, 작곡은 창작 행위만이 아닌 음악적 제작 행위에서, 말하자면 즉흥 연주(improvisation) 같은 행위 또는 그 이상의 행위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비서구 문화권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활동은 작곡의 의미를 확대해 주었고, 따라서 창작의 본래 의미는 작곡이 내포한 여러 뜻 중의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음악의 역사가 창작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한 한정된 상황이 해결된 셈이다.

동양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음악도 전통적으로 작곡과 연주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작곡가가 연주가이고 연주가가 작곡가이다. 연주가가 재현하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한다. 재현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연주가이고 발전의 측면으로 해석하면 작곡가이다. 이때 작곡가는 전 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주어진 소재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종의 제작하는 행위자이다. 창작자(creater)가 아니라 제작자(producer)의 성격이 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작곡이라는 어휘는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는 행위를 뜻하고, 창작하는 주체를 작곡가라고 말한다. 작곡(composition)과 작곡가(composer)의 의미가 이러하므로 창작이 아닌 음악 제작 행위에 이 어휘를 사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블래킹(John Blacking)은 이런 제작 행위를 ‘음악 만들기(music-making)’라고 하였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의 명확성을 위해 음악을 제작하는 행위와 그 어휘에 대해 서술하였고, 우리나라 전통 음악의 특징으로 보아 음악을 제작하는 행위를 말하는 여러 어휘 중에서 블래킹의 용어를 우선 사용하도록 하겠다. ‘음악을 작곡’하고 ‘음악을 창작’한다는 표현 대신 ‘음악을 만든다’는 개념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중국의 문헌에 ‘탁곡(度曲)’이란 용어가 있다. ‘도곡’이라고도 읽을 수 있지만 ‘도(度)’ 자를 헤아린다는 의미로 쓸 때는 탁곡이라고 읽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동양에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이 있듯이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곡을 작곡가가 아닌 연주가들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변주(變奏)해 나가는 방법을 ‘신성탁곡금고통(新聲度曲今古通)’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옛날 음악에서 새로운 소리를 헤아려 만들면 지금의 새로운 곡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탁곡을 통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비서구 음악에서 곡은 작곡가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익명성(匿名性)을 띠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음악가가 조금씩 변주해 나가면서 새로움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어 그러한 관습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탁곡은 즉흥 연주가 아닌 생성 구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대화를 할 때 문 법에 맞추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말해 가는 생성 문법(生成文法)과 같은 것이다. 서양 음악 이론가나 작곡가는 흔히 이러한 현상을 즉흥 연주(卽興演奏)라고 하는데, 즉흥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지 우리 음악과 같이 주어진 장단 안에서 시김새나 한배를 적절히 변화시켜 나가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생성 구조의 음악은 아니다. 또한 서양 음악의 화성 구조(和聲構造)는 이조(移調) 또는 전조(轉調)에 의하여 변화를 주지만, 우리 음악의 생성 구조에서는 ‘곱놀이(甲彈)’에 의하여 변조(變調)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마치 『어은보(漁隱譜)』란 고악보(古樂譜)에서 처음 상령산(上靈山)이 기보(記譜)되어 있고 그 다음곡인 중령산(中靈山)을 영산회상갑탄(靈山會上甲彈)이라고 부르고 있는 예와 같다.

이 글에서 또 하나 밝혀 두어야 할 전제는 악곡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 얼마간 연구된 바 있으므로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창작의 역사를 전개하고, 악곡 만드는 방법과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 이 글이 역사의 진행 중에 포함된 음악 만들기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한국사의 시대 구분에 따라 서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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