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3. 독립 예술로서의 음악, 삼국시대
  • 고구려 음악
권오성

357년(고국원왕 27)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10여 종의 악기 연주 그림과 춤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전실(前室)에는 소(簫)·입고(立鼓)와 노래하는 그림, 후실(後室)에는 거문고·완함(阮咸)·장소(長簫)와 춤추는 그림, 회랑(回廊)에는 담고(擔鼓)·담종(擔鍾)·이중고(二重鼓)·소·각(角)·요(饒)로 행진하는 그림이 있다. 전실의 연주 그림은 중국 한나라 때 궁중 뜰에서 연주하던 황문고취(黃門鼓吹)이고, 후실의 춤추는 그림은 잔치 음악이며, 회랑의 행진하는 그림은 행진 음악의 하나인 단소요가(短簫饒歌)이다. 이 벽화를 통해 4세기 이전에 한나라 음악이 고구려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에 들어온 한나라 음악은 규모로 보아 민간에서 연주한 것이 아니라 궁중 의식에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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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고취악대(鼓吹樂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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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고취악대(鼓吹樂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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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 1호분의 잡희 장면
장천 1호분의 잡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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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때인 4세기 후반 인도의 불교가 비단길을 통해 서역(西域)과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들어왔으며, 이로부터 1세기가 지난 5세기경부터 서역 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 지안(集安)의 장천 1호분 고분 벽화가 이를 말해 주고 있는데, 관악기로는 횡적(橫笛)·대각(大角)·장소(長蕭)·피리(觱篥), 현악기는 거문고·오현(五絃)·완함·오현금(五絃琴)이 보인다. 5세기경에 만든 무용총에는 춤과 거문고·대각을 연주하는 그림이, 각저총에는 소와 북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악기로 알려진 거문고의 유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악지」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처음 진(晋)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더니 고구려 사람은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소리와 음곡(音曲) 및 타는 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으로서 그 음곡을 알아서 탈 수 있는 이를 구하여 후히 상을 주기로 하였다. 그때에 제2상(第二相) 왕산악(王山岳)이 본 모 양을 그대로 두고 구조를 고쳐서, 이것을 만들고는 다시 100여 곡을 지어 이를 연주하였다. 이때에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추었으므로 드디어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는데 후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 하였다.9)『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1, 악(樂).

하지만 원래 악기 모양을 설명한 내용이 없어서 그 당시의 거문고가 오늘날의 거문고와 같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거문고의 제작 연대 또한 『삼국사기』에 밝혀져 있지 않고, 거문고 제작의 동기가 된 칠현금을 보낸 진나라 사람이 서진(256∼316) 사람인지, 동진(317∼420) 사람인지조차도 분명치 않다. 또한 중국의 칠현금과 거문고는 악기 구조와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금을 개조한 것이 거문고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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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벽화의 현금
무용총 벽화의 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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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용총 벽화를 살펴보면, 17괘 위에 얹혀 있는 4현을 술대로 타고 있는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괘, 술대 등의 모양이 오늘날의 거문고와 대체로 같다. 그리하여 이 악기를 16괘 6현으로 된 현행 거문고의 고형(古形)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오회분 5호묘 벽화에도 거문고 그림이 있 으며,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금동 관정번 천개(金銅灌頂幡天盖)에도 괘 위에 얹힌 4현을 술대로 타는 악기의 그림이 있다.10)이혜구·장사훈·성경린, 『국악사』, 한국 국악 학회, 19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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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분 4호묘의 주악 비천상
오회분 4호묘의 주악 비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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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세기경에 축조된 제17호분에는 완함, 각, 금(琴), 소, 횡적, 요고(腰鼓)의 그림이 있고, 7세기에 편찬한 『수서(隋書)』 「동이전」과 『북사(北史)』 「고구려전」에는 오현, 금, 쟁(箏), 피리, 횡취(橫吹), 소, 고(鼓)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6∼7세기의 고구려 음악은 이전에 사용하던 완함, 각, 금(거문고), 소, 횡적, 오현, 피리, 북 외에 새로 요고와 쟁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는 초기에는 한사군(漢四郡)을 통해 한나라 음악 문화가 유입되어 이 음악이 주로 궁중 음악으로 향유된 듯하며, 중기 이후에는 서역과 중국의 악기가 대량으로 들어와 궁중과 민간 할 것 없이 굉장히 발달한 음악 문화를 누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의 가요로는 기원전 17년(유리왕 3)에 왕이 지은 황조가(黃鳥歌)를 최초로 하여 공후인(箜篌引)·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州) 등이 알려져 있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라는 내용의 황조가는 고구려 음악의 서정성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어서 유리왕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영고나 수신제(隧神祭) 같은 제의 때에 한 부족장이 부른 노래가 유리왕의 작품으로 오인되어 『삼국사기』에 실렸다는 주장도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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