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4. 다양화·국제화된 음악,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 음악
권오성

신라 음악은 통일 이후에 크게 확장되었다. 중국을 통해 당악과 불교 음악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서역 음악까지 활발하게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용된 외래 음악은 고유한 신라 음악과 어우러져 음악 문화를 국제적으로 발전시켰다. 외래의 거대한 음악 양식에 대해 신라 음악은 향악(鄕樂)으로 구별되었으나, 외래 음악 양식은 신라 음악과 만나 수용과 변형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화되어 다양하고 풍요로운 향악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이를 향유하면서 한편으로 일본에 건네주어 일본의 음악 문화 형성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금환(金丸)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환을 희롱하니 / 廻身掉臂弄金丸

달이 돌고 별이 흐르는 듯 눈에 가득 신기롭다 / 月轉星浮滿眼看

좋은 동료 있다 한들 이보다 더 좋으리 / 縱有宜僚那勝此

넓은 세상 태평한 줄 이제야 알겠구나 / 定知鯨海息波瀾

월전(月顚)

높은 어깨 움츠린 목에 머리털 일어선 모양 / 肩高項縮髮崔嵬

팔 걷은 여러 선비 술잔 들고 서로 싸우네 / 攘臂羣儒鬪酒盃

노랫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는데 / 聽得歌聲人盡笑

밤에 휘날리는 깃발 새벽을 재촉하누나 / 夜頭旗幟曉頭催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 黃金面色是其人

구슬채찍 들고 귀신 부리네 / 手抱珠鞭役鬼神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 있게 춤추니 / 疾步徐趍呈雅舞

붉은 봉새가 요임금 봄철에 춤추는 것 같구나 / 宛如丹鳳舞堯春

속독(束毒)

엉킨 머리 남빛 얼굴, 사람과는 다른데 / 蓬頭藍面異人間

떼 지어 뜰 앞에 와서 난새 춤을 배우네 / 押隊來庭學舞鸞

북 치는 소리 둥둥 울리고 겨울바람 쓸쓸하게 부는데 / 打鼓冬冬風瑟瑟

남쪽 북쪽으로 달리고 뛰어 한정이 없구나 / 南奔北躍也無端

산예(狻猊)

일만 리 머나먼 길 사방 사막 지나오느라 / 遠涉流沙萬里來

털옷은 다 해지고 티끌만 뒤집어썼네 / 毛衣破盡著塵埃

머리와 꼬리를 흔드는 모습, 어진 덕 배어 있도다 / 搖頭掉尾馴仁德

영특한 그 기개 온갖 짐승 재주에 비할쏘냐18)『삼국사기』 권32, 잡지1, 악. / 雄氣寧同百獸才

이 시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이다. 시 제목인 금환·월전·대면·속독·산예는 놀음 또는 잡희(雜戲)의 이름이 다. 금환은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인데, 고구려와 백제의 농주지희(弄珠之戲) 같은 것이며, 우륵의 12곡 가운데 있는 보기(寶伎)와도 유사한 놀이로 여겨진다. 월전은 “노랫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는데”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골계희(滑稽戲) 곧 우희(優戲)인 것으로 생각된다. 대면·속독·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로 놀이꾼이 가면을 쓴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 놀이는 가면희(假面戲)이다. 이들 놀이 또는 잡희에는 반드시 음악이 반주되거나 음악과 함께 공연이 베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의 시에는 음악과 관련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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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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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악잡영 5수’는 최치원이 885년(헌강왕 11)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에 지은 시라고 볼 수 있는데, 신라에서 베풀어지는 외래의 음악과 놀이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외래의 음악과 놀이는 다름 아닌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며, 그 유전(遺傳) 경로와 시기는 밝히기 어려우나 적어도 수나라 이전부터 신라에 흘러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19)장사훈, 『증보 한국 음악사』, 세광 음악 출판사, 1986, 113쪽. 그리고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데에서 최치원 당대에는 이미 신라인에게 익숙한 음악으로 향악 속에 동화(同化)되었음이 분명하다. 외래의 음악과 놀이가 이 땅에 들어와서 동화하는 과정은 적어도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중국에서 전해진 당악의 대칭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향악은 토착 신라 음악은 물론이고 외래의 것이지만 이미 향악화된 음악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 이외에 신라의 음악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신라의 향토색이 진한 향악이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가얏고 중심이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가얏고·거문고·향 비파의 삼현, 대금·중금·소금의 삼죽, 당악기인 대고(大鼓)·박판(박자 맞추는 나무쪽) 등 여덟 종의 악기가 더해졌다. 이와 같은 향악 편성은 가얏고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음악에 비하여 매우 풍부하고 확대된 음악 구성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조에서도 향악기 연주에 당악의 악조가 사용됨에 따라 향악 자체의 음악 내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거문고에는 평조(平調)·우조(羽調), 향비파에는 궁조(宮調)·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 대금·중금·소금에는 평조·황종조(黃鐘調)·이아조(二雅調)·월조(越調)·반섭조(般涉調)·출조(出調)·준조(俊調) 등이 연주되었다.

신라의 음악은 삼죽·삼현과 박판·대고와 가무(歌舞)가 있다. 춤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복두(幞頭)를 쓰고 자줏빛 큰 소매가 달린 공복(公服) 난삼(襴衫)을 입으며, 붉은 가죽에 도금한 대구(帶鉤)를 단 허리띠를 매고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삼현은 거문고·가얏고·비파이고, 삼죽은 대금·중금·소금이다.20)『삼국사기』 권32, 잡지1, 악.

이렇듯 신라의 악기는 향악기인 가얏고와 삼죽 외에도 고구려 악기인 거문고와 서역의 악기인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인 박·대고 등이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있었다.

거문고는 중국 진(晋)나라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이 개조한 악기이데, 이 악기의 곡으로 100여 곡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거문고를 만든 시기는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지 않아서 불확실하다. 다만 357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안악 3호분의 벽화와 무용총의 벽화에 나타난 거문고의 연주 모습 등으로 4세기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왕산악 이후에 고구려의 거문고 음악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전파된 거문고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옥보고(玉寶高)→속명득(續命得)→귀금(貴金)→윤흥(允興)→안장(安長)·청장(淸長)→극상(克相)·극종(克宗)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극종의 뒤로는 거문고로 업을 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 만든 곡들은 평조와 우조로서 모두 187곡이 있었으나, 모두 소리로만 세상에 전해져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되고 다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아울러 『삼국사기』에는 옥보고가 지은 악곡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곧, 상원곡(上院曲)·중원곡(中院曲)·하원곡(下院曲)·남해곡(南海曲)·의암곡(倚嵒曲)·노인곡(老人曲)·죽암곡(竹庵曲)·현합곡(玄合曲)·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오사식곡(五沙息曲)·원앙곡(鴛鴦曲)·원호곡(遠岵曲)·비목곡(比目曲)·입실상곡(入實相曲)·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강천성곡(降天聲曲) 등이 그것이다. 이름만 기록에 남았을 뿐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선가(仙家)의 음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문고가 언제 신라에 들어왔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왕이 거문고 음악이 끊어질까 근심하여 이찬(伊湌) 윤흥으로 하여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귀금 선생에게 그 음률을 전수받으라고 명령하였다.”는21)『삼국사기』 권32, 잡지1, 악.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거문고의 전승을 위한 신라인들의 애정은 매우 각별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이 신라 음악을 발전시킨 하나의 근간이 되었음은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가얏고는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적인 현악기인데, 일반적으로 가야금(伽倻琴)이라 불리나 이는 한자화된 명칭이다. 옛 문헌의 한글 표기는 언제나 ‘가얏고’로 되어 있다.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이것을 만들었다. 왕이 “모든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기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 있느냐.” 하며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악사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은 가야국에 전란이 있게 되자, 가얏고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화하였다. 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고, 대나마(大奈麻)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음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전해 받고는 “모두 빠르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 하여 다섯 곡으로 줄였다. 우륵이 듣고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그 다섯 가지의 음악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기를 “즐거워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하고 어전(御前)에서 연주케 하니, 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신하들이 간언하기를 “망한 가야국의 음률을 족히 취할 것이 못 됩니다.” 하였으나 왕은 “가야국이 음란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무릇 성인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연유하여 조절하게 함이니, 나라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은 음악 곡조에 기인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행하니 비로소 대악(大樂)이 되었다. 가얏고에는 두 음조가 있으니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로, 모두 185곡이다.22)『삼국사기』 권32, 잡지1,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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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彈琴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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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얏고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인 쟁(箏)을 본떠 만든 악기라고 하지만 우륵이 신라에 의탁해 온 551년(진흥왕 12) 당시에는 당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잘못된 기록이다. 가얏고 연주자인 우륵이 진흥왕 때에 신라로 귀화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얏고를 제작한 연대는 6세기 이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가얏고는 오늘날의 풍류 가야금과 같이 12현과 양이두(羊耳頭)를 갖추고 있었다.23)『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2년 3월.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다. 이 가운데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군현(郡縣) 이름과 같아서 해당 지역의 민속 음악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24)양주동, 『고가 연구』, 일조각, 1970, 30∼31쪽.

한편, 우륵은 가얏고를 배우러 온 법지·계고·만덕 세 사람에게 각각의 재능에 따라 법지에게는 노래, 계고에게는 가얏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25)『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3년. 이로 볼 때 가야의 음악은 노래와 함께 춤을 추던 연향악(宴饗樂)이었다. 『삼국사기』 「악지」에는 “689년(신문왕 9)에 신촌(新村)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가무(笳舞)는 감(監) 여섯 명, 가척(笳尺) 두 명, 무척(舞尺) 한 명이었고, 하신열무(下辛熱舞)는 감 네 명, 금척(琴尺) 한 명, 무척 두 명, 가척(歌尺) 한 명이었으며, 사내무(思內舞)는 감 세 명, 금척 한 명, 무척 두 명, 가척 두 명이었고, 한기무(韓岐舞)는 감 세 명, 금척 한 명, 무척 두 명이었으며, 상신열무(上辛熱舞)는 감 세 명, 금척 한 명, 무척 두 명, 가척(歌尺) 두 명이었고, 소경무(小京舞)는 감 세 명, 금척 한 명, 무척 한 명, 가척(歌尺) 세 명이었으며, 미지무(美知舞)는 감 네 명, 금척 한 명, 무척 두 명이었다. 807년(애장왕 8)에 음악을 연주함에 비로소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하였는데, 무척 네 명은 푸른 옷을 입고, 금척 한 명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가척(歌尺) 다섯 명은 비단 옷에 수 놓은 부채를 들고 금루대(金縷帶)를 띠고 있었다. 다음은 대금무(碓琴舞)를 연주하였는데, 무척은 붉 은 옷을 입었고,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26)『삼국사기』 권32, 잡지1, 악.는 기록이 있어서 가얏고의 음악이 노래와 춤과 함께 공연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알려 준다. 곧, 한기무·미지무·대금무에는 노래 없이 가얏고만 곁들어졌으며, 하신열무·사내무·상신열무·소경무·사내금무 등은 가얏고와 노래와 춤이 결합된 예술이었다.

이렇듯 가야의 음악은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채택되어 연향됨으로써 전통 음악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여겨진다. 이 밖에도 신라 음악으로는 향비파 212곡과 대금 324곡, 중금 245곡, 소금 298곡 등의 음악이 더 있었다고 하나 악곡 수만 전해질 뿐 이름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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