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4. 다양화·국제화된 음악, 남북국시대
  • 발해 음악
권오성

발해악은 740년(문왕 4) 12월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기진몽(己珍蒙) 등이 일본 왕 앞에서 발해악을 연주하면서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그 후 749년(문왕 13) 일본 궁중에서 당악 및 오악(吳樂)과 더불어 발해악이 연주되었다. 이 같이 일본 궁중에서 연주된 발해악을 일본 악공(樂工)이 연주하였는지, 발해 악공이 연주하였는지 문헌적인 근거는 없지만 발해의 음악 기관이었던 태상시(太常寺)에서 직접 파견한 악사와 악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연주되던 음악에는 발해의 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27)권오성, 『한민족 음악론』, 학문사, 1999, 65쪽.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문헌에는 발해악에 관한 기록이 없다. 중국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내용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1171년 후지하라 시죠(藤原師長)가 편찬한 악곡집인 『인지요록(仁智要錄)』에는 발해 음악으로 신말갈(新靺鞨)·신조소(新鳥蘇)·고조소(古鳥蘇)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등 중국 측 기록과 『속일본기(續日 本紀)』·『일본후기』·『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삼대실록(三代實錄)』 등의 일본 측 기록을 통해 발해악의 대략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발해악은 일본의 닌묘 천황(仁明天皇, 833∼849) 때에 가가쿠료(雅樂寮)가 악제를 개편할 때 삼국악(三國樂)과 더불어 고려악(高麗樂)으로 통합되어 가가쿠료의 우방악(右坊樂)에 속하였다. 따라서 발해악에 포함되었던 발해 춤도 우무(右舞)였던 고려악의 무악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28)전인평, 『새로운 한국 음악사』, 현대 음악 출판사, 2000, 123쪽. 당시 발해악은 고구려의 음악 전통을 기반으로 말갈족과 당나라의 음악까지 수용하여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발해악이 일본의 고려악 형성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한편, 발해는 고려악(고구려악)이란 명칭으로 당나라에도 악공을 파견하기도 하였다.29)김육불(金毓黻),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권15, 의부(義部).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발해악은 송나라와 금나라에서 이어졌다. 송나라에서는 1185년 3월에 발해악의 연습을 중지시켰는데,30)『송사(宋史)』 권35, 본기35, 효종 12년 3월 신묘. 이는 발해 악인의 후예가 발해 멸망 후에도 송나라 궁중에서 발해악을 연습하며 전통을 이어 갔기 때문에 취한 조처일 것이다.31)송방송, 앞의 책, 1984 참조.

발해의 악기는 대부분 고구려의 악기를 계승한 것이었고, 대표적인 것이 발해금(渤海琴)으로 알려진 현금(玄琴)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사(宋史)』에는 발해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발해금은 낮게 눌린 가락이 모호하여 잘못하면 너무 탁해진다. 그러므로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속으로는 성정이 흔들리고 밖으로는 수족이 어지러워진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만만하고 쉽게 여기면 절도를 범하고 방종하게 흐르면 본질을 잊으며, 넓으면 간사함을 용납하고 좁으면 욕심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다.32)『송사』 권131, 지(志)84, 악(樂)6.

이 발해금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거문고로 여겨진다. 그것은 삼국시대 일본에 소개된 악기의 이름에 전래된 나라의 이름을 붙이던 예가 많기 때문 이다. 우륵이 가얏고를 신라에 전하자 그 악기를 신라 사람들이 가얏고라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의 신라 악사가 가얏고를 일본에 전하자 일본 사람들이 신라금(新羅琴)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춤과 노래도 함께 따르기 때문에 발해악에도 노래 및 악기 연주와 함께 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金)나라 명창 연간(明昌年間, 1190∼1195)에 발해 교방(敎坊)으로 하여금 악과 무를 겸해서 익히도록 하였다는 기록이나, 발해 교방 30명이 금의 교방 50명, 문수서(文繡署) 여공(女工) 50명 등과 함께 활약한 기록은 발해무가 금나라의 궁중에서 전승되고 있던 모습을 보여 준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무용수의 후예인 발해 교방은 금나라에서 발해무를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33)송방송, 「발해악 소고」, 『동양학』 14, 단국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1984 참조. 송나라와 금나라의 궁중에서 12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던 발해의 악무는 그 후에 없어졌는지 송나라와 금나라 이후의 중국 문헌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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