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5. 중국 음악의 창의적 수용, 고려
  • 향악
권오성

향악은 당악에 대한 일반적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악이 유입되기 이전의 모든 삼국의 음악을 향악이라 칭하게 된다. 삼국의 음악은 각기 자생적 음악을 소유함과 동시에 외래 음악도 공존하였으나, 외래 음악은 점차 자생 음악에 융화되어 삼국의 음악으로 흡수되었다. 이런 삼국의 음악이 단일 양식으로 향악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고려의 향악은 『고려사』 「악지」에는 속악(俗樂)이라는 명칭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왕립 음악 기관인 대악서(大樂署)·관현방(管絃房)·아악서(雅樂署)의 우부(右部)에서 관장하며 좌부(左部)에서 관장하는 당악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좌부의 당악과 우부의 향악을 합쳐 양부악(兩部樂)이라 불렀다.

고려의 향악은 통일신라의 향악 전통을 바탕으로 당시 음악의 최대 수요층인 귀족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사』 「악지」에는 32곡의 향악곡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정읍(井邑)·동동(動動)·무애(無㝵)·서경(西京)·대동강(大同江)·오관산(五冠山)·양주(楊洲)·월정화(月精花)·장단(長湍)·정산(定山)·벌곡조(伐谷鳥)·원흥(元興)·금강성(金剛城)·장생포(長生浦)·총석정(叢石亭)·거사연(居士戀)·처용(處容)·사리원(沙里院)·장암(長巖)·제위보(濟危寶)·안동자청(安東紫靑)·송산(松山)·예성강(禮城江)·동백목(冬栢木)·한송정(寒松亭)·정과정(鄭瓜亭)·풍입송(風入松)·야심사(夜深祠)·한림별곡(翰林別曲)·삼장(三藏)·사룡(蛇龍)·자하동(紫霞洞) 등이 그것이다.

고려의 향악곡은 대부분 거문고 같은 향악기의 반주에 따라 부른 노래였던 것으로 여겨지나, 무고·동동·무예는 노래가 아닌 향악 정재였다. 정재(呈才)는 궁중의 경사스런 잔치에 연행되던 춤으로 본래 임금 앞에서 춤과 재주를 포함하여 모든 재능과 기예를 드린다는 헌기(獻技)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향악과 향악 정재를 구별하여 향악 정재를 궁중 무용의 대명사처럼 사용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그냥 향악 안에 정재를 포함시킨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향악은 노래뿐만 아니라 춤이 포함되었던 넓은 개념이었다.

이 밖에도 고려의 향악으로는 도이장가(悼二將歌)·쌍연곡(雙鷰曲)·태평곡(太平曲)·후전진작(後殿眞勺)·죽계별곡(竹契別曲) 등이 있었으며,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50여 곡이 있었는데, 신라와 백제의 민간 속어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여 러 문헌 자료를 보아서 고려시대의 향악곡은 이 밖에도 상당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향악은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도 있었으나, 고구려·백제·신라의 노래를 계승한 것도 있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동경(東京) 두 곡·여나산(余那山)·장한성(長漢城)·이견대(利見臺) 등 여섯 곡이 신라의 향악을 계승한 것으로 나타나고, 백제의 향악으로는 선운산·무등산·방등산·정읍·지리산 등 다섯 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내원성·연양·명주 등 세 곡이 고구려의 향악을 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향악기로는 현금(거문고)·비파(향비파)·가얏고·대금·장고·아박(牙拍)·무애(無㝵, 장식이 있음)·무고(舞鼓)·해금(奚琴)·피리·중금·소금·박(拍) 등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다양한 향악기를 이용한 향악의 연주 양상도 이전 시기보다 매우 새로워졌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 제도 그대로이다. 다만 향악에는 고(鼓)·판(版)·생(笙)·우(竽)·필률(피리)·공후·오현·금·비파·쟁(箏)·적(笛)이 있어 그 모양과 제도가 약간씩 다르다. 슬(瑟)의 기둥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또 소(簫)가 있는데 그 관(管)의 길이가 두 자 정도로 호금(胡琴)이라고 부른다. 몸을 굽혀서 먼저 그것을 불어 가지고 여러 악기의 소리를 시작하게 한다.34)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40, 동문(同文), 악률(樂律).

이 글에 따르면 11종의 향악기가 나타나는데, 이 중 향비파·거문고·가얏고로 알려진 오현·금·쟁은 통일신라의 삼현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거문고·향비파·가얏고·대금·중금·소금은 신라의 삼현과 삼죽의 전통을 전승한 악기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고려사』 「악지」에는 삼현삼죽의 여섯 개 향악기 외에도 아박·무애·무고·박·장고·해금·피리 등이 새로 추가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아박·무애·무고·박은 음악 연주를 위한 악기라기보다는 궁중 정재의 무구(舞具)였다. 그리고 장고·해금·피리는 주로 춤의 반주에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5)이혜구, 『한국 음악 서설』,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66 ; 송방송, 「음악」 『한국사』 21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국사 편찬 위원회, 1996 참조.

가야금은 옛 진 나라의 쟁 같은 것인데 / 加耶琴類古秦箏

그대의 빌려준 정에 깊이 감사드리네 / 多感君侯借與情

옛 곡보는 잊어버려 율조 맞추기 어려워 / 舊譜忘來難協律

백 번을 타고서야 겨우 두서너 마딜 기억하네 / 百彈方記兩三聲

긴 날을 보내기 어려워 쟁을 빌렸었는데 / 長日難消借得箏

약속한 때에 돌려보내도 정은 잊지 않네 / 及期還寄未忘情

줄마다 혀가 있으니 돌아가서 말할 것이라 / 絃絃舌在歸應道

졸렬한 솜씨인 내가 무슨 교묘한 소릴 타드라고36)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후집 권4, 고율시(古律詩) 98수, 「박 학사에게 이 시를 부치고 가얏고를 반환하다(寄朴學士還加耶琴)」. / 手拙吾何作巧聲

고려 후기에 명문장가로 일세를 풍미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한시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 외에도 이규보가 가얏고를 소재로 읊은 시가 여러 편 있어서 그가 음악과 풍류를 상당히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는 가얏고 외에도 거문고를 즐겼으며, 거문고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시와 글을 남겼다.

나의 거문고는 곡조가 없다. 무엇이 상(商) 소리인지 무엇이 궁(宮) 소리인지, 거문고는 대체 무슨 물건이며 소리는 얼마나 온화하냐. 차갑게 졸졸 하는 것은 돌 사이 여울에서 소리를 가져온 것인가. 우우 솔솔 하는 것은 소나무 바람에서 소리를 빌려 온 것인가. 만일 졸졸 하는 것을 여울로 돌려보내고 솔솔 하는 것을 소나무에 돌려보낸다면 다시 고요하여 저 허공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37)『동문선(東文選)』 권49, 명(銘), 금명(琴銘).

이규보 외에도 고려의 문인들이 가얏고나 거문고 또는 향비파 등으로 반주하는 음악을 즐기기도 하고 스스로 연주하기도 하는 등 향악기를 애용하였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대표적인 향악기였던 삼현이 고려 사회에 그대로 전승되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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