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5. 중국 음악의 창의적 수용, 고려
  • 대성아악
권오성

고려시대 음악의 주류는 향악과 당악이었지만, 12세기부터는 대성아악이 새로 등장하여 고려 음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대성아악은 대성악(大晟樂)이라고도 불리는데, 송나라 휘종(徽宗) 때에 왕립 음악 기관인 대성부(大晟府)에서 새로 제정한 아악에서 유래하였다. 곧, 대성악은 대 성부의 아악 또는 대성부의 새로운 음악인 대성신악(大晟新樂)의 줄임말이지만, 1116년(예종 11)에 고려 조정에 소개된 이후 주로 대성아악이라 불렀다.

1114년(예종 9) 사신 안직숭(安稷崇)이 귀국하면서 송나라 휘종이 준 철방향(鐵方響)·비파·오현금·쌍현금·쟁(箏)·공후·필률·저·지·소·포생(匏笙)·훈·대고·장고·백판(栢板) 등의 악기와 곡보(曲譜) 10책, 지결도(指訣圖) 10책을 가져왔다. 고려에서는 이들 악기를 신악기라 하고, 음악을 신악(新樂)이라 부르면서 그 해 10월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태묘(太廟) 제례에서 향악과 함께 연주하였다.47)『고려사』 권70, 지24, 악1, 아악(雅樂), 송신사악기(宋新賜樂器).

예종이 송나라 휘종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1116년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하례사(賀禮使)로 보내자, 휘종은 또다시 대성악과 그 음악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등가 악기(登歌樂器)와 헌가 악기(軒架樂器) 등의 아악기를 대량으로 보내 주었다. 이때 들여온 등가 악기는 편종(編鐘)·편경(編磬)·일현금·삼현금·오현금·칠현금·구현금·슬(瑟)·지·저(篴)·소·소생(巢笙)·화생(和笙)·훈·박부(搏拊)·축(柷)·어(敔) 등 17점이며, 헌가 악기는 편종·편경·일현금·삼현금·오현금·칠현금·구현금·슬·지·저·소·소생·우생(竽笙)·훈·진고(晉鼓)·입고(立鼓)·축·어 등 18종이었다.48)『고려사』 권70, 지24, 악1, 아악, 유사섭사등가헌가(有司攝事登歌軒架)·등가악기(登歌樂器)·헌가악기(軒架樂器). 송나라에서는 이렇게 큰 규모의 악기 편제 외에도 연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휘번(麾幡)과 무구(舞具), 의물(儀物), 의관(衣冠), 무의(舞衣) 등 대성악 연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냈다. 이것이 바로 대성아악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된 때로 1116년(예종 11) 6월의 일이었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악은 1116년 10월 태묘 제사에 연주하였고, 1134년(인종 12) 1월에는 적전(籍田)에서 연주하였다. 그 후 대성악은 대사(大祀)인 태묘를 비롯하여 원구(圓丘)·사직(社稷)과 중사(中祀)인 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묘(文宣王廟) 제례에 편성·연주하였다. 곧, 궁중 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례에는 모두 대성아악을 연주한 것이다.

음악을 유지·계승하려면 악기를 제작하여야 하고 연주에 필요한 각종 의물의 생산과 정비, 연주가의 교육과 양성 등이 뒤따라야 하는데, 이에 관한 고려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송나라에서 보내 준 악기는 점점 손상되는 데다, 송나라 음악이 기본적으로 우리의 체질과 맞지 않으면서 “음악의 결함과 혼란이 막심하다.”는 한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성아악은 점차 침체(沈滯)에 빠진다. 『고려사』에서는 대성아악의 쇠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선왕 때에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할 것’을 청하여 결재를 받았으나 주관 부서에서 이것을 늦추면서 시행하려 하지 않았다. 식자들이 한탄하기를 “이 악은 송나라에서 제작한 신악으로 예종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본래 송 태조가 제정한 음악은 아니다. 그런데 이 악을 사용한 지 얼마 안 되어 송나라가 어지러워졌으며 더욱이 신사년(1161)에 우리나라의 유신(儒臣)과 미친 악사가 함부로 개작한 탓으로 가무의 차례가 드나들었으며 그 오르내리는 순서가 뒤섞여 어지럽다.49)『고려사』 권70, 지24, 악1, 아악, 헌가악독주절도(軒架樂獨奏節度).

이에 따르면 대성아악의 쇠퇴는 1116년(예종 11)에 대성아악을 수입하면서 아악기의 연주법이 전수되지 않은 것, 1161년(의종 15)에 고려의 유신과 악사가 멋대로 아악 연주를 개작한 사실, 1188년(명종 18)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이 제대로 연습할 형편이 못 되는 점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에 승지 서온(徐溫)이 송나라에 들어가 연주법을 익히고 돌아와서 악공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성아악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채 100년도 못되어 “높고 낮은 질서가 문란하고 낮은 음이 높은 음을 억누르는” 데에 이를 정도로 이미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성아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에 그대로 보존·계승되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고려의 유신과 악사가 개작하였다는 사실은 자주적 입장에서 고려의 사정에 알맞게 고쳤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나라가 중국 음악을 수용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과소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50)송방송, 앞의 글, 1996, 487쪽 참조.

한편, 무신 정권기와 몽고와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악공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악기는 손실되는 등 대성아악은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된다. 대성아악의 전통이 거의 수습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아악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1389년(공양왕 1) 악학(樂學)을 설립하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아악서(雅樂署)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악학 및 종묘(宗廟)의 악가(樂歌)를 익히기 위해서 설립한 아악서는 대성아악의 침체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악학과 아악서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의 음악 기관으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악의 부흥은 조선 세종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성균관(成均館)에서 음력 2월과 8월 공자를 제사 지내는 석전제(釋奠祭) 때에 연주하는 대성악은 세종 때 박연(朴堧)·유사눌(柳思訥)·정인지(鄭麟趾)·정양(鄭穰) 등이 『주례(周禮)』·『통전(通典)』·『악서(樂書)』 등의 중국 원전을 참작(參酌)하여 많이 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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