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6. 예악으로서의 음악, 조선
  • 아악의 부흥과 당악의 향악화
권오성

신라와 고려 이래로 수입된 당악과 아악은 조선에 들어서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세종 이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 이전까지의 아악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고제(古制) 아악을 제정하였으며, 당악은 차츰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새로운 양식에 밀려서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54)황준연, 「조선 전기의 음악」, 『한국 음악사』 한국 예술사 총서 Ⅲ, 대한 민국 예술원, 1985, 220쪽 참조.

세종 때의 아악 혁신은 『아악보(雅樂譜)』를 새로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세종은 아악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유사눌·정인지·박연·정양 등에게 명하여 옛 음악을 수정하게 하였다.

지금 봉상시에 보존된 악기는 고려 예종 때에 송나라 휘종이 준 편종(編鍾)과 공민왕 때에 고황제가 준 종(鍾)과 경(磬) 수십 개가 있으며, 우리 태종 문황제가 준 종과 경 수십 개가 있을 뿐이다. 이제 그 소리에 따라서 편종을 주조하고, 좋은 돌을 남양(南陽)에서 얻어 편경(編磬)을 만드니 악기가 모두 일신해졌다. …… 『시악(詩樂)』 12편은 개원 연간(開元年間, 713∼741)에 전해 온 음악이어서 옛날의 음악이 아니며, 『석전악보(釋奠樂譜)』 17궁(宮)도 그대로 다 믿기 어렵다. 그러나 이 두 악보 이외에는 다시 의거할 곳이 없으므로, 의례악에서 순수하게 일곱 종류의 소리(七聲)만을 사용한다는 취지와, 소아(小雅)의 6편 26궁의 원칙을 가지고 이것을 부연하여 312궁을 만들어서 조회악(朝會樂)을 갖춘다. 『석전악보』에서는 순수하게 7성·12궁의 원칙을 가지고 부연하여 144궁을 만들어서 제사악(祭祀樂)을 갖춘다. …… 옛 음악은 이미 다시 볼 수 없으나, 이제 황종(黃鍾)을 음성의 기본에서 찾아내어 28개의 음성을 마련하였고, 크고 작으며 높고 낮은 것이 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아니한 점에 있어서는, 주자(朱子)와 채씨(蔡氏)의 뜻이 1,000년 이후에 이르러 조금이라도 펴게 되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우리 왕조를 기다리어 이루어졌다고 아니할 수 없다.55)『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윤12월 정유(1일) ; 『세종실록』 권136, 악보 서.

고려 예종 때 수입된 대성아악이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원형과 제도가 변형되자, 세종은 새롭게 고제 아악을 정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1430년(세종 12)에 제정한 아악은 조회악과 제사악(제례악)으로 구분되는데, 조회 아악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1430년 9월의 일이었다. 세종이 조회나 하례(賀禮)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시작된 것이다.56)『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9월 기유(11일). 이에 따라 1431년(세종 13) 정월 초하루의 조하(朝賀)에서 조회악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는데, 『세종실록』에는 “그 의용(儀容)과 법도(法度)와 성악(聲樂)이 선명하고 위의가 있어 볼만하였다.”57)『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병인(1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조회악을 연주한 절차와 그 악곡을 보면, 임금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융안지악(隆安之樂)을, 신하들이 임금에게 절할 때에는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임금이 환궁할 때에 다시 융안지악을 연주하였다.

조회악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지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있는 ‘풍아십이시보(風雅十二詩譜)’ 중의 녹명(鹿鳴)·남산유대(南山有臺)·어리(魚儷)·황황자화(皇皇者華)의 네 곡을 발췌하고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만든 곡은 융안지악·휴안지악(休安之樂)·문명지곡(文明之曲)·무열지곡(武烈之曲)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주하였고, 조선 초기에 만든 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命命)·하황은(荷皇恩) 등도 모두 ‘풍아십이시보’ 중의 악곡을 변화시키고 가사를 바꾼 것이다.

이렇듯 조회악의 연주를 성공리에 마치자 회례(會禮)에서의 아악 연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58)『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8월 갑오(2일). 그 후 회례악의 연주에 사용할 악기와 음악, 의물과 복식 등이 마련되자, 1433년(세종 15) 근정전에서 베푼 정월 초하루의 회례연에서 아악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59)『세종실록』 권59, 세종 15년 1월 을묘(1일). 이때 연주한 회례악에서는 융안지악·서안지곡·휴안지악·수보록지악(受寶籙之樂)·하황은지기(荷皇恩之伎)·수룡음지악(水龍吟之樂)·포구락지기(抛毬樂之伎)·황하청지악(黃河淸之樂)·아박지기(牙拍之伎)·만년환지악(萬年歡之樂)·무고지기(舞鼓之伎)·태평년지악(太平年之樂)·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연주하였다. 특히 세종조의 회례악에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에 곁들여 악장(樂章)이 따르는데, 태조와 태종의 공덕을 각각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제정한 조회악과 회례악을 세종 이후에는 연주하지 않았고, 성종 이후에는 예전처럼 당악과 향악을 조회와 회례 의식에서 연주하였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성종대에는 임금이 출궁할 때에는 전정악(殿庭樂)으로 여민락만(與民樂慢) 또는 성수무강만(聖壽無疆慢)을 연주하였고, 신하들이 절할 때에는 낙양춘을, 임금이 환궁할 때에는 여민락령이나 보허자령(步虛子令) 또는 환궁악(還宮樂)을 연주하였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삼은 조선 왕조에서는 제례 아악을 중시하였으나, 그 가운데에도 종묘에 제사 드릴 때 연주하는 종묘 제례악은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종묘 제례악은 임진왜란 때 종묘가 불타버린 뒤로 1608년(선조 41)에 다시 중건할 때까지 잠시 중단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도 10년 동안 중지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다시 복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종묘는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만큼 종묘 제례악의 연행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이에 전란 후의 사회적 혼란과 장악원(掌樂院) 악공 수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종묘 제례악은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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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향친제반차도(五享親祭班次圖)
오향친제반차도(五享親祭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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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제례악은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답습하다가 1395년(태조 4) 11월 고려의 옛 제도를 바꾼다는 원칙 아래 종묘의 악장(樂章)을 고쳤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세종대에 이르러 “아악은 본디 우리나 라의 성음(聲音)이 아니고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는데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어떨까.”60)『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9월 기유(11일).라는 의식 속에 종묘 제례악을 위시하여 사직·원구·선농·선잠 등의 제례악을 정비하였다. 이렇게 정비한 제례악의 틀은 조선시대 내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1460년(세조 10)에 이르러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이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되었으며, 1626년(인조 4)에는 보태평 11곡에 중광장(重光章)을 새로 더하였다. 선조의 광국중흥(光國重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종묘의 선조실에 중광 악장을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이로써 새로 만든 중광장을 보태평의 정명(貞明) 다음에 삽입시키고, 정명은 앞의 용광(龍光)과 합쳐 용광정명장(龍光貞明章)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보태평 11곡은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중광(重光)·대유(大猶)·역성(繹成)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765년(영조 41)에 새로 만든 악장을 보태평이나 정대업에 추가하지 않도록 결정함에 따라 종묘 악장은 현재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다.61)송방송, 앞의 글, 1998, 552∼553쪽.

세종 때에 만든 조회악과 회례악은 전승되지 않고 있지만 제례악은 현재에도 연주하고 있다. 종묘 제례악만이 세조 때에 약간의 개정을 거친 이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대의 아악 부흥은 중국 문헌을 바탕으로 그대로 모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창조적 재현’을 통해 전통을 창출해 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한다.62)송방송, 「음악」, 『한국사』 27 조선 초기의 문화 Ⅱ, 국사 편찬 위원회, 1996, 404쪽. 아악 제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세종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는데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어떨까.”라는 고민을 실토하고 있는 데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 세종대의 아악 부흥은 음악 이론가인 박연(朴堧, 1378∼1458) 의 절대적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내가 조회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입법과 창제가 예로부터 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때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국가가 무사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라.”63)『세종실록』 권59, 세종 15년 1월 을묘(1일).는 세종의 당부 아래 박연은 조회악·회례악·제례악의 제정, 악서 편찬 등을 통해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율관(律管) 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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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부부 초상
박연 부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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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이 부흥한 반면에 당악은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다. 아악이 장악원의 좌방(左坊)을 차지하게 되면서 좌방에 소속되어 있던 당악은 향악과 함께 우방(右坊)에 소속됨으로써 급속히 향악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속악보(俗樂譜)』,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악전보(大樂前譜)』 등을 통해 1434년(세종 16) 이후에 당악이 전승된 상황을 살펴보면 표 ‘조선시대 당악 전승 상황’과 같다.

표를 보면 1447년(세종 29)에 간행한 『속악보』보다 1471년(세조 2)에 간행한 『경국대전』에 수록된 당악곡의 수가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 때의 당악곡이라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속악보』보다 1759년(영조 35)에 간행한 『대악전보』에 더 많이 수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전승된 당악곡의 수효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당악은 주로 정재 반주에 많이 쓰였는데, 보허자·오운개서조·만엽치요도·반하무·절화·소포구락·백학자·헌천수·중선회·하성조· 회팔선·파자·금잔자·서자고·천년만세 등 16곡이 당악 정재의 반주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표> 조선시대 당악 전승 상황
수록 책
악곡명
속악보 경국대전 대악전보 수록 책
악곡명
속악보 경국대전 대악전보
금전락(金殿樂)     절화(折花)
금잔자(金盞子)     정대업(定大業)    
낙양춘(洛陽春)   정동방(靖東方)    
만엽치요도(萬葉熾瑤圖)   중선회(衆仙會)
백학자(白鶴子)   청평악(淸平樂)  
반하무(班賀舞)   천년만세(千年萬歲)  
보태평(保大平)     태평년만(大平年慢)    
보허자(步虛子) 파자(破子)    
삼진작(三眞勺)     포구락(抛毬樂)    
서자고(瑞鷓鴣)     풍안곡(豊安曲)    
성수무강(聖壽無疆)     하성조(賀聖朝)    
소포구락(小抛毬樂)   하운봉(夏雲峰)  
수룡음(水龍吟) 헌천수(獻天壽)  
억취소(憶吹簫)   환궁악(還宮樂)    
여민락(與民樂)     환환곡(桓桓曲)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회팔선(會八仙)  
전인자(前引子)   후인자(後引子)  

성종 이후 당악의 향악화 현상은 매우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당악기와 향악기가 함께 편성되는 향당교주(鄕唐交奏)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미 세종 때에 해금·장고·월금(月琴)·당비파가 향악 연주에 편성되었고, 성종 때에 당적·아쟁·당피리·태평소·박 등이 향당교주에 추가되어 당악기가 향악기화하고 당악이 향악화되는 양식 변동 현상이 진행 되고 있었다. 『악학궤범』에 도설(圖說)되어 있는 당부(唐部) 악기를 분석해 보면, 당악기 가운데 당악 연주에만 쓴 것은 방향·대쟁·당적·당피리·퉁소의 다섯 가지이고, 향악 연주에만 쓴 것은 월금과 해금이 있으며, 당악과 향악의 연주에 모두 쓴 것은 박·교방교·장고·당비파·아쟁·태평소의 여섯 가지이다.64)『악학궤범』 권7,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 ; 송방송, 앞의 글, 1996, 429쪽. 여기에서 향악 연주에만 쓰거나 당악과 향악 연주에 모두 쓴 여덟 종의 당악기는 당악의 향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당악의 양식 변동은 당악 양식이 향악 양식으로 변하는 동시에 당악이 갖고 있던 고유한 양식을 포기하고 향악으로 변형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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