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1장 음악 만들기
  • 6. 예악으로서의 음악, 조선
  • 고취악, 세악, 내취
권오성

고려의 고취악은 조선에 계승되어 정대업·보태평·발상·봉래의 등의 새로운 악곡을 만들 때 뼈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위장과 노부의 두 양식이 고려시대와 동일하지는 않아서 팔관 노부와 연등 노부가 없어졌으며, 위장 의식이 없어짐에 따라 기악과 잡기를 더 이상 궁중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장과 노부에서 취각군과 취라군이 악공으로 대치되었다.75)송방송, 앞의 책, 1984, 342∼343쪽.

『악학궤범』에는 조선 전기에 연주한 고취악으로 전정 고취(殿庭鼓吹)·전후 고취(殿後鼓吹)·전부 고취(前部鼓吹)·후부 고취(後部鼓吹) 네 가지가 열거되어 있다. 전정 고취와 전후 고취는 악공들이 궁중의 뜰에 앉아서 연주하는 형태이고,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는 임금의 거둥 때 수레의 앞뒤를 따르며 행진 음악을 연주하는 형태이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전정 고취와 전후 고취의 진열은 그림 ‘전정 고취의 구성’ 및 ‘전후 고취의 구성’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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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 고취의 구성
전정 고취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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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고취의 구성
전후 고취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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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樂師) 두 명과 악공 50명으로 구성된 전정 고취는 매달 5일에 임금이 친히 문무백관을 만나는 조참(朝參) 때, 임금이 몸소 참석하여 급제한 사람의 등수를 매기는 시험인 문과 전시(文科殿試)를 행할 때,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로 급제한 사람에게 백패(白牌)를 주고 술과 안주 등을 베푸는 방방(放榜) 때, 임금이 중국 황제에게 보낼 표문(表文)이나 전문(箋文)을 사신에게 전하여 보내는 배표(拜表)와 배전(拜箋)의 권정례(權停禮) 때 연주하였다. 악사 한 명과 악공 18명으로 구성된 전후 고취는 왕이 출궁(出宮)하거나 환궁(還宮)할 때 연주하였는데, 사알(司謁)의 신호에 따라 연주를 시작하고 왕이 정전으로 들어가면 박을 급히 쳐서 연주를 그쳤다.

그런데 성종대에 악공의 수가 50명이던 전정 고취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인조대에는 40명으로 줄고, 정조대에는 27명으로 줄어들어 계속 축소되는 양상이었다.76)『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5 ; 『춘관통고(春官通考)』 권50. 그리하여 악기 편성에서도 전기에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고르게 배치되었으나, 고취 악공의 수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향비파·가얏고·거문고·대쟁·아쟁·월금 같은 현악기가 악기 편성에서 제외되고, 교방고가 새로 추가되는 등 관악기 위주로 편성되었다.

임금의 어련(御輦) 앞뒤를 따르면서 연주하는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는 사직과 종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 행차할 때의 행진 의식을 갖춘 대가 노부(大駕鹵簿)와 선농(先農)·석전(釋奠) 등의 제사를 친히 지내려 행차할 때의 행진 의식을 갖춘 법가 노부(法駕鹵簿)에 포함되었다. 능행(陵幸)·관사(觀射)와 같은 소가 노부(小駕鹵簿)에는 전부 고취만이 따랐다. 『악학궤범』에 도설되어 있는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를 살펴보면 그림 ‘전부 고취의 구성’ 및 ‘후부 고취의 구성’과 같다.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의 악대는 각각 악사 한 명과 악공 50명으로 편성되었다. 왕이 가마(輿)를 타고 궁에서 나와서 가마에서 내려 연(輦)을 탄 뒤 행차할 때 음악을 연주하고, 왕이 연에서 내려 입차(入次)할 때 급히 박을 쳐서 음악을 그쳤다. 환궁할 때에는 반대로 연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궁 안으로 들어가면 박을 급히 쳐서 음악을 그쳤다.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 또한 축소되는 과정을 거쳐 정조대에 이르면 각 각 악사 한 명과 악공 40명으로 편성되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는 행진하면서 연주하는 악대였기 때문에 현악기보다는 관악기로 편성되었는데, 후기에 이르러 해금과 교방고가 새로 추가되고 있어 이채롭다. 그러나 현재도 해금이 관악기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에서 악기 편성이 관악기 위주였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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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고취의 구성
전부 고취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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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 고취의 구성
후부 고취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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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고취 계열에 드는 세악(細樂)과 내취(內吹)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현재의 취타(吹打) 또는 대취타(大吹打)의 전통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8세기부터 통신사(通信使)의 행렬도 및 『대전회통(大典會通)』·『춘관통고(春官通考)』 등에 등장하는 세악과 내취는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처럼 나발·나각·태평소·자바라·북·징 등의 관악기와 타 악기로 악기를 편성하여 행악(行樂)을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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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통신사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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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에 작성한 통신사행렬도에 따르면 사신 행렬의 앞에 서는 악대인 취고수(吹鼓手)는 13명이 따랐는데, 나팔수(喇叭手) 두 명, 나각수(螺角手) 두 명, 태평소(太平簫) 두 명, 세악(자바라) 한 명, 동고(銅鼓) 한 명, 고타수(鼓打手) 두 명, 삼혈수(三穴手) 한 명, 쟁수(錚手) 두 명이었다. 사신 행렬의 뒤를 따르는 세악수(細樂手)는 해금 한 명, 북 한 명, 젓대 한 명, 장고 한 명, 피리 한 명, 동고 한 명, 전악(典樂) 한 명으로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런데 국사 편찬 위원회에 소장된 통신사행렬도에 따르면 조태억(趙泰億)이 1711년(숙종 37)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올 때 수행한 취고수와 세악수는 모두 51명에 달한다. 취고수는 36명으로 나팔수 여덟 명, 나각수 여섯 명, 태평소 여섯 명, 동고 두 명, 세악(자바라) 네 명, 고타수 여섯 명, 삼혈수 두 명, 고수(鼓手) 두 명이고, 세악수는 여덟 명으로 해금 두 명, 장고 두 명, 젓대 두 명, 피리 두 명이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1876년(고종 13) 김기수(金綺秀)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올 때 세악수 여섯 명, 취고수는 각수(角手) 두 명, 나수(螺手) 두 명, 가수(笳手) 두 명, 정수(鉦手) 두 명, 고수 두 명으로 10명이 수행하였다.

1785년(정조 9)에 간행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비로소 등장하는 겸내취(兼內吹)와 원내취(元內吹)에서 유래된 내취는 왕이 거둥하거나 정전에 나올 때 시위(侍衛)하는 악공이다.77)송방송, 「음악」, 『한국사』 35 조선 후기의 문화, 국사 편찬 위원회, 1998, 558쪽. 원래는 서울의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한 취고수만을 내취라 하였으나, 뒤에는 다른 지방에서 선발되어 각 군문(軍門)에 있는 취고수도 포함하였다. 이를 구별하고자 중앙의 악사들은 황 천익(黃天翼)에 초립(草笠)을 써 황내취라 하고, 지방의 악사들은 흑천익(黑天翼)에 초립을 써서 흑내취라 하였는데, 후에 황내취는 원내취로, 흑내취는 겸내취로 명칭이 바뀌고 의관도 황내취의 것으로 통일하였다.

이들 내취는 국왕의 행차 이외에도 1829년(순조 29) 자경전(慈慶殿)의 진찬 때 선유락(船遊樂) 정재의 반주를 담당하였던 듯하다. 이때 내취들의 악기 편성은 징 한 명, 북 두 명, 호적 여섯 명, 자바라 네 명, 나발 네 명으로 다섯 종 17명으로 구성되었다.78)장사훈, 앞의 책, 224쪽. 내취들이 궁중에서 펼친 선유락 정재 반주 활동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다양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나타나고 있다.

정재 반주나 국왕의 행차를 따르면서 연주할 때의 악기 편성은 주로 징·태평소·나각·나발·북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악기 편성은 내취의 성격이 취고수와 매우 밀접하였음을 말해 주며, 현재 연행되는 대취타의 악기 편성과도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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