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2장 기보법의 발달과 악보
  • 1. 기보법의 발달과 종류
  • 육보
권오성
확대보기
『악학궤범』의 의음 표시
『악학궤범』의 의음 표시
팝업창 닫기

육보는 정간보·오음약보·합자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용하던 최초의 기보법이다. 고려시대부터 이미 거문고·가야금·대금·피리·비파 같은 악기의 독특한 음색을 본떠서 명칭화(名稱化)한 육보를 사용하였다. 현재 전하는 많은 수의 악보가 육보의 방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보는 우리나라 음악 연구를 위하여 중요하다.

육보는 악기에서 나는 소리에 가까운 의음(擬音)을 본떠서 적는 구음(口音)으로 표시하는 악보이다. 예를 들어 『악학궤범(樂學軌範)』의 거문고 설명에 나오는 ‘랭’이나 ‘랭’은 거문고 소리를, 가얏고 설명에 나오는 ‘댕’은 가얏고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곧, 악기의 소리를 입으로 흉내 낸 소리(구음)로 표시한 악보가 육보이다. 그런데 악기마다 구음이 다르고, 구음 한 자에 두 개 이상의 음이 해당하는 경우도 있어 실제의 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세종실록악보』의 서문 내용은 세종 이전에 이미 육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전대에는 성음(聲音)의 절주(節奏)와 소삭 완급(疏數緩急)을 기보하는 악보가 없고, 다만 소리를 본받아 육보를 만들어 음악을 전하였다. 또 비파·현금(玄琴)·가얏고·적·피리는 악보가 각각 달라 번잡하고 깨우치기 어려우며 노래 악보가 없다. 이제 사죽(絲竹)·노래(歌)·장고(杖鼓)·박판(拍板)을 한데 묶어 총보(總譜)를 만드니 간략하여 번거롭지 않고 분명하여 깨우치기 쉽다.86)『세종실록』 권48, 악보 서.

한편, 고려시대부터 전해 오는 향악 정재(鄕樂呈才)의 하나인 동동(動動)에 대해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동동’은 북소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동(動動)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건대, 지금 광대들이 입으로 북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이 그것이다. 동동은 동동(鼕鼕)과 같은 뜻이다.87)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5, 인사문(人事門), 동동곡(動動曲).

대개 동동(鼕鼕)은 북소리이니, 동동으로 박자를 삼아 율동(鼓動)하는 뜻 이다. 국조(國朝) 『악학궤범』에 동동의 악보가 실려 있으니, 아박(牙拍) 치는 소리에 맞추어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면 여러 기녀가 따라 화합하면서 한 번 나아갔다 한 번 물러나고 한 번은 서로 마주 보다가 한 번은 서로 등지며 혹은 좌로 갔다가 혹은 우로 가고 혹은 팔이나 무릎으로 서로 치고 춤추며 뛰었다. 동(動)은 동(鼕)과 음이 같으므로 와전(訛傳)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88)이익, 『성호사설』 권15, 인사문, 소가(笑歌).

동동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속요(俗謠)인 청산별곡(靑山別曲)의 후렴구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도 피리나 대금 같은 관악기의 구음으로 보기도 한다. 『세종실록』이나 『성호사설』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육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음악 표기법으로 여겨지는데, 아쉽게도 그 표기법을 전하는 고려시대의 악보를 찾아볼 수 없다.

확대보기
『삼죽금보』
『삼죽금보』
팝업창 닫기

그런데 육보는 악기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르게 기보되었던 만큼 한 가지 악기를 위한 음악 표기는 가능하였지만 여러 악기의 합주를 표시할 수 없었다. 『세종실록』의 아악보(雅樂譜) 서(序) 가운데 “비파·현금·가야금·젓대·피리의 악보가 각각 달라서 복잡하고 알아보기가 어려웠다.”는89)『세종실록』 권48, 악보 서. 내용은 바로 그러한 점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성(趙晟, 1492∼1552)이 편찬한 현금 악보인 『조성금보(趙晟琴譜)』에 육보의 표기법이 보인다. 이 악보에는 거문고와 대금의 표기법이 나와 있다. 육보 로 된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안상(安瑺)이 1572년(선조 5)에 편찬한 『금합자보(琴合字譜)』이다. 여기에는 거문고 악곡이 합자보·오음약보·육보의 세 가지 기보법으로 표기되고, 장구와 북의 악보는 그림으로 기보되어 총보의 형식으로 적혀 있다.

육보는 조선 후기 악보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고종 초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죽금보(三竹琴譜)』, 1886년(고종 23)에 윤용구(尹用求)가 편찬한 『현금오음통론(玄琴五音統論)』 등은 육보만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로써 육보를 중심으로 악보를 기재하는 방식이 18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19세기 전기에 정착하여 20세기 전반기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육보를 중심 기보법으로 사용한 배경은 풍류객(風流客)들이 거문고의 수법이나 연주 기법보다도 가락의 높낮이나 진행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이다.90)송방송, 「조선 후기의 음악」, 『한국 음악사』 한국 예술사 총서 Ⅲ, 대한민국 예술원, 1985, 401∼403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