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2장 기보법의 발달과 악보
  • 2. 나라에서 펴낸 악보와 악서
  • 『세조실록악보』
권오성

『세조실록악보』는 『세조실록』 권48과 권49에 실려 있는 악보집이다. 세조는 조회악이 절도에 맞지 않은 이유를 악보가 없기 때문으로 파악하여 음악 이론가인 황효성(黃孝誠) 등에게 악보를 그려서 올리게 하는103)『세조실록』 권32, 세조 10년 1월 경진(27일). 등 음악 이론의 정립과 악보 편찬에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황효성은 세조대의 음악 정비에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근본을 깨닫고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완급을 알고 악보를 많이 지었다.”104)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는 평을 받고 있다. 따라서 『세조실록악보』는 세조 때에 이루어진 모든 음악적 업적을 집대성해 놓은 악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세조 때 새로 제정한 신제아악보, 등가헌가지도(登架軒架之圖), 무도부고정(舞圖附考定), 신제약정악보(新製略定樂譜) 등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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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악보』의 신제약정악보
『세조실록악보』의 신제약정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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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음악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음악이 예악으로서 갖고 있는 기능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고요하면서도 능히 당겨서 끌고, 약하면서도 능히 강한 것을 이기고, 낮아도 범하지 못하며, 태극(太極)을 보유하고 지도(至道)를 함축하며 조화(造化)를 운용하는 것”105)『세조실록』 권1, 총서.이 악(樂)의 공효(功效)라고 하여 음악이 예악으로서 지닌 기능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예악으로서의 음악은 풍화(風化)를 수립하고 공덕을 상징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이에 음악은 단순히 소리로서의 예술 행위가 아니라 의례에 수반되는 정치적 의식이었으며, 그에 따라 악기 종류, 연주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관리 감독을 하였던 것이다.

세조대에 이룩한 음악사적 업적은 종묘 제례악의 재정비, 새로운 기보법의 창안, 왕립 음악 기관의 재정비, 향악 선법의 이론 정립 등을 들 수 있다.106)송방송, 「세조조 음악 업적의 역사적 조명」, 『한국 중세 사회의 음악 문화』 -조선 전기편-, 민속원, 2003 참조.

세조는 세종 때 이미 창작한 보태평과 정대업을 가지고 종묘와 원구단(圓丘壇) 제사에 이용하기 위해 악보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세종 때에 종묘 제례악으로 쓴 정대업과 보태평의 음악과 춤에 따르는 노랫말은 구절이 많아서 제사를 지내는 짧은 사이에 다 연주할 수 없었으며, 원구단 제사의 음악과 춤은 제정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지은 정대업·보태평의 악무(樂舞)의 가사 자구 수가 많아서 모든 제사를 지내는 사이에 다 연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 뜻만 따라서 간략하게 짓고, 교천(郊天)의 악무도 아울러 정하였다. 이미 악무가 있었으나, 진찬(進饌)하거나 변두(籩豆)를 거두거나 송신(送神)하는 악이 없었으므로, 최항 등이 청하자 임금이 또 최항에게 명하여 그 가사를 짓게 하였다.107)『세조실록』 권31, 세조 9년 12월 을미(11일).

이때부터 최항(崔恒, 1409∼1474) 등이 정대업과 보태평의 가사를 간략 하게 만들었고, 아울러 원구단 제사 때 쓰는 음악과 춤이나 종묘 제사 때 사용할 노래의 가사도 새로 지었다. 그리하여 정대업은 15곡에서 11곡으로 줄였고, 악장의 노랫말을 대부분 축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곡명과 곡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음악 또한 축소되거나 선율이 바뀌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6정간을 기준으로 정대업의 첫 곡인 소무(昭武)는 48행에서 16행으로, 혁정(赫整)은 96행에서 48행으로 각각 줄였다. 보태평도 마찬가지로 악장의 노랫말이 대부분 축소되고, 곡명이 일부 바뀌기도 하였으며, 음악 또한 축소되었다. 16정간을 기준으로 보태평 첫 곡과 둘째 곡인 희문(熙文)과 계우(啓宇)는 48행에서 16행으로, 정명(貞明)은 20행에서 12행으로 각각 줄었다.

원구단에 지내는 제사 음악으로는 희문·융안(隆安)·기명(基命)·선위(宣威)·탁정(濯征)·성안(成安)·영안(寧安) 등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종묘 제사 때 영신·진찬·철변두(徹籩豆) 등의 의식에 각각 쓰는, 치음(徵音)을 궁(宮)으로 하는 청황종조(靑黃鐘調)인 희문지악·풍안지악·응안지악(凝安之樂)의 가사를 새롭게 창작하였다.

이렇게 새로 제정한 종묘와 원구단의 제사 음악과 춤, 노랫말은 1464년(세조 10) 1월에 이르러 종묘와 원구단 제사 때 연주되어 완성되었다. 이에 세조는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드는 것은 대개 100년이 되어야 가히 일으킬 수 있는 것인데 세종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다행히 하루아침에 완성하고, 이에 교묘(郊廟)의 제사에 써서 연주하니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한다.”108)『세조실록』 권32, 세조 10년 1월 무진(15일).는 교지를 내렸다. 음악과 춤, 노랫말을 새로 제정하고 동시에 악보를 편찬하는 사업이 끝났음을 알린 것이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 제사 때 문무와 무무에 쓰는 악무곡으로 문무는 초헌에, 무무는 아헌에 각각 사용하였다. 그런데 『세조실록악보』는 정대업과 보태평을 오음약보로 기보하였으며, 진찬곡으로 헌가에서 연주하는 풍안지악을 오음약보와 공척보를 함께 사용하여 기보하였다. 문무에 쓴 조 곡 형식으로 된 보태평의 11개 곡 선법은 모두 청황종조의 치조(평조)로 통일되어 있으며, 무무에 쓴 정대업의 11개 곡 선법도 모두 청황종조의 우조로 통일되어 있다. 그 중 정대업의 혁정과 영관(永觀)은 아름답고 우아한 가요 선율의 특징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원구단 제사의 악곡으로는 단일 악장으로 된 희문·융안·기명·선위·탁정·성악·영안과 아울러 아홉 개 악장으로 된 경근 등의 18개 악곡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공척보로 된 아악보가 실려 있으나 이것은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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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악보』의 진설도
『세조실록악보』의 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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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조실록악보』의 등가지도(登架之圖), 헌가지도(軒架之圖), 보태평지무도(保太平之舞圖), 정대업지무도(定大業之舞圖) 등을 통해 당시 등가악과 헌가악 그리고 보태평무와 정대업무에서 어떤 악기를 썼으며, 가수와 무용수는 몇 명이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에 따르면 등가악에는 피리·대금·퉁소·당적·지·훈·생·화·해금·향비파·가야금·현금·아쟁·대아쟁·월금·당비파·방향·특경·편경·특종·편종·축·어·장구·절고·박판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31명과 가수 여섯 명이 참가하였으며, 헌가악에는 등가악의 악기 이외에 소금·중금·태평소·교방고·노고·도고 등의 악기를 다루는 악공 52명, 가수 여덟 명과 아울러 수많은 무용수가 참가하였다.

이와 같이 종묘 제례악과 원구단의 제사악을 오음약보와 16정간보로 전해 주는 『세조실록악보』는 조선 전기 제례 아악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고악보이다. 또한 『세조실록악보』는 대부분 궁중 제례악에 쓰던 악곡을 수록한 것 외에도 세조 때에 새로 창안한 16정간보 및 오음약보를 통해 고려의 향악과 당시의 음악을 후대에 전승해 주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음악사 연구에 꼭 필요한 귀중한 자료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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