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3장 기록의 역사로 본 음악 문헌
  • 2. 조선시대의 3대 악서
  • 음악의 경서로 외롭게 남은 책, 『악서고존』
김세종

『악서고존』은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55세 되는 해인 1816년(순조 16)에 완성한 필사본 악서이다. 총 12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전하는데, 「악론(樂論)」과 더불어 정약용이 연구한 음악학의 전모를 알려 주는 책이다. 정약용은 『악서고존』을 저술할 무렵 풍증(風症)을 앓아 글쓰기가 어려웠는데,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상황과 질병의 엄습에도 굴하지 않고 온 힘을 기울여 저술한 역작임을 알 수 있다.

『악서고존』은 차례에서부터 정약용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은 차례를 크게 ‘논(論)’·‘변(辨)’·‘박(駁)’·‘사(査)’·‘정(訂)’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여기에 용안(鏞案)이라 하여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덧붙 이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이 『서경』을 연구한 『상서고훈(尙書古訓)』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그가 고문(古文)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풀어 가는 하나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정약용은 ‘논’에서 중국의 악률 이론을 논증하고, ‘변’에서는 중국 악률 이론의 하나인 ‘율(律)을 불어서 소리를 정한다’는 ‘취율정성(吹律定聲)’에 대한 잘잘못을 분변하여 밝혔다. ‘박’에서는 잘못된 악률 이론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사’에서는 정약용이 경전을 통해 얻은 율려의 대법을 살펴서 새롭게 세우고, ‘정’에서는 역대 중국의 악률 이론에 대한 그릇됨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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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서고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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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정약용은 스스로 정립한 음률 산출 이론을 가지고 악기를 직접 제작해 보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그의 악률 이론은 중국의 악률 이론처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심지어 로그 함수까지 동원되는 산출 이론이 아니라, 크게 하늘의 율수(律數) 3과 땅의 여수(呂數) 2로 대별하고 그 수만큼 음의 차이가 난다는 ‘삼기육평(三紀六平)’으로서 명쾌하고 간단한 대경대법(大經大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악서고존』은 편찬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약용은 “춘추(春秋) 이후 『악경(樂經)』이 소실되자 고악(古樂)이 없어지고 성인의 도가 또한 어두워졌으므로 그 이론에 대해 변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46)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 시문집(詩文集) 12, 「악서고존서(樂書孤存序)」. 또 「악론」에서 음악에 대한 효용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인의 도(道)도 음악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제왕의 정치도 음악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으며, 천지만물의 정(情)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음악의 덕(德)이 이처럼 넓고 깊은데도 삼대(三代) 이후에 오직 음악만이 완전히 망실되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백세(百世)토록 훌륭한 정치가 없었고 사해(四海)에 착한 풍속이 없는 것은 모두 음악이 망실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147)정약용, 『여유당전서』 1, 시문집, 11, 악론(樂論)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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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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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악서고존』을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은 이 악서를 통해 육경(六經)의 하나인 『악경』과 고악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곧, 고악의 질서는 성인의 정치로 가는 길목임을 강조하고, 음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음률과 소리의 높낮이를 산정하는 산출 방법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여러 악서에서 한결같이 주장해 온 ‘취율정성’과 소리의 높낮이 산출 방법인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대한 인식을 달리함으로써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중국의 여러 악서에 전하는 음률 이론을 전적으로 믿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전을 중심으로 한 음률관(音律觀)을 새롭게 정립하여 삼기육평이라는 대의를 세워 놓고 『악서고존』을 저술하였다. 『악서고존』을 완성한 후, 그가 형인 정약전(丁若銓)에게 “2000년 동안의 긴 밤에 한번 꾼 꿈처럼 이제야 대악의 혼이 돌아왔다.”, “요순 시절 고악이 없어진 이후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하여 골라 놓았다.”라고148)정약용,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15, 묘지명(墓誌銘), 「선중씨정약전묘지명(先仲氏丁若銓墓誌銘)」. 하였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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