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3장 기록의 역사로 본 음악 문헌
  • 4. 기록으로 남긴 춤, 무보
김세종

음악과 춤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춤은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행사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자연히 집단적인 노래를 동반한다. 따라서 악(樂)·가(歌)·무(舞)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음악의 곡조를 일정한 기호로 표기한 악보(樂譜)처럼 춤의 동작을 일정한 기호나 그림으로 기록한 것을 무보(舞譜)라고 하는데, 무보에서도 음악에 관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궁중의 경사스런 잔치에 연행하던 춤을 정재(呈才)라고 하는데, 본래 정재는 ‘재예(才藝)를 드린다’는 뜻의 헌기(獻技)에서 유래되었다. 사전에서도 정재를 “대궐 안의 잔치 때에 벌이던 춤과 노래”라 풀이하고 있다.150)국립 국어원, 『표준 국어 대사전』, 두산 동아, 1999. 이처럼 정재는 순전히 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노래를 수반한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정재는 계통에 따라 향악 정재(鄕樂呈才)와 당악 정재(唐樂呈才)로 구분된다.151)『고려사(高麗史)』 권71, 지(志)25, 악지(樂志). 향악 정재는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궁중 무용을 말하며, 당악 정재는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온 중국의 속악(俗樂)을 궁중 무용으로 채용한 것이다. 그러나 당악 정재는 오랜 세월을 두고 변형되면서 향악 정재와 동화되었기에, 다만 춤의 구성 면에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즉, 당악 정재는 긴 장대에 수술로 장식한 죽간자(竹竿子)를 두 명이 들고 무용수의 등장·퇴장을 인도하는 반면, 향악 정재는 죽간자가 등장하지 않고 무용수가 직접 인사를 하면서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다. 궁중 정재의 일반적 특성은 순수한 춤 동작뿐 아니라 춤의 내용을 노래와 결합하여 표현한 점이다. 노래의 종류에는 창사(唱詞), 치어(致語), 구호(口號)가 있는데, 창사는 일반적으로 궁중 정재에 쓰는 노래로서 가사는 춤의 내용을 설명하며 무용수가 부른다. 치어는 무용수 중 중무(中舞)가 부르는 노래이며 구호는 입타령이라고도 하는데, 당악 정재의 창사, 치어, 구호는 순 한문인 반면, 향악 정재는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현존하는 무보로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와 『시용무보(時用舞譜)』를 들 수 있다. 홀(笏)이란 관원(官員)이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었을 때 손에 드는 물건으로 길이 30㎝, 너비 6㎝의 비교적 얄팍하게 만든 것이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을 때 홀의 뒷면에 적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후로 홀의 크기에 알맞은 모양의 종이에 각종 의식에 관한 여러 절차를 적은 글을 홀기(笏記)라고 일컬었다.152)성경린,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해제(解題)」, 『시용무보(時用舞譜),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한국 음악학 자료 총서 4, 국립 국악원, 1980, 6쪽. 따라서 『정재무도홀기』는 궁중 정재의 절차를 기록한 무보로, 홀 모양의 두꺼운 종이를 병풍식(屛風式)으로 접게 되어 있다. 『정재무도홀기』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베푸는 각종 진연(進宴) 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었는데, 원래 수백 종이 있었으나, 6·25 전쟁 등으로 인하여 거의 산실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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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무도홀기
정재무도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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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1893년(고종 30)에 작성된 『정재무도홀기』가 국립 국악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총 1권 1책 55장으로 구성되었다. 많은 정재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데 당악 정재로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연화대(蓮花臺)·몽금척(夢金尺)·하황은(荷皇恩)·장생보연지무(長生寶 宴之舞)·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제수창(帝壽昌)·최화무(催花舞)·육화대(六花隊) 등이 전하며, 이 중 육화대무(六花隊舞)는 한글로 기재되어 있다. 향악 정재로는 무고(舞鼓)·아박(牙拍, 고려 때의 동동)·봉래의(鳳來儀)·향발무(響拔舞)·학무(鶴舞)·처용무(處容舞)·광수무(廣袖舞)·공막무(公莫舞)·무애무(無㝵舞)와 평안도 성천(成川)에서 널리 행해지던 사자무(獅子舞), 항장무(項莊舞) 등이 전한다.

이처럼 『정재무도홀기』는 여기에 수록된 춤의 종류와 내용 면에서 충실하여 가장 신빙성 있는 홀기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고유의 정재 50여 종 가운데 1920년 당시에는 겨우 10종 정도만 전해졌으나, 이 홀기를 바탕으로 20여 종까지 재현할 수 있었다.153)성경린, 앞의 글, 7쪽.

한편 『시용무보』는 종묘 제례악의 일무(佾舞, 사람을 여러 줄로 벌려 세워서 추게 하는 춤)를 기록한 것으로,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세종 때에 회례 의식에서 조선 역대 임금의 무공(武功)을 칭송하기 위하여 만든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과 문덕(文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만든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을 연주하였는데, 이것이 세조 이후 종묘 제향(宗廟祭享)의 일무로 사용되었다. 『시용무보』는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1면을 4행(行)으로 나누고 1행을 다시 6박(拍)으로 나눈 후, 각 행간마다 좁은 칸을 두었다. 즉, 세로는 모두 8행이고 가로는 6정간(六井間)인 셈으로 오른쪽 좁은 행간에 궁상하보(宮上下譜)154)궁상하보(宮上下譜)란 세조가 창안한 유량악보(有量樂譜)로 주로 향악을 표기하는데 사용하였다. 어떤 선법의 중심 음을 ‘궁(宮)’으로 표시하고 그 음계를 따라 한 음 위를 ‘상1(上一)’, 두 음 위를 ‘상2(上二)’ 등으로 표시하고 아래로는 ‘하1(下一)’, ‘하2(下二)’ 등으로 표시한다. 오음약보(五音略譜) 혹은 상하일이보(上下一二譜)라고도 한다.의 악보를 적고, 넓은 행간에는 춤 그림(舞圖)과 춤사위를 설명하는 술어(術語)를 적었다.155)성경린, 앞의 글, 3쪽. 이처럼 『시용무보』는 종묘 일무를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춤사위 하나하나를 술어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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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용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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