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3장 기록의 역사로 본 음악 문헌
  • 6. 개인 문집 속의 음악
김세종

문집(文集)이란 개인이 생전에 남겨 놓은 글을 한데 모아 일정한 체재로 편집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문집에는 주로 개인의 시문(詩文), 제문(祭文), 조정에 올린 상소문(上疏文), 가까운 사람과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인 간찰(簡札)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음악을 전문적으로 기록해 둔 개인 문집은 그리 많지 않다. 예로부터 예(禮)에 밝은 사람은 시대마다 있으나 악(樂)에 밝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였듯이, 음률의 이치와 음악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문집은 손꼽아 몇 개 되지 않는다. 또 문집 속에 음악과 관련된 글을 찾는다 해도 대부분 음풍농월(吟風弄月)한 한시(漢詩) 속에 등장하는 악기 이름이나 악곡 등을 비유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더러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생전에 연주하던 음악을 악보로 남겨 놓거나, 생전에 음악을 관장하는 지위에 머무르면서 음악의 이모저모를 심도 있게 다룬 것도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시대 개인 문집 중에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기록한 것으로는 세종대 박연(1378∼1458)이 올린 39편의 상소문을 모은 『난계선생유고(蘭溪先生遺槀)』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병와집(甁窩集)』에 수록된 『악학편고(樂學便考)』 및 『악학습령(樂學拾零)』 등을 들 수 있다. 『난계선생유고』에 수록된 상소문 39편은 대부분 악기·음률·악제 등 음악에 관련된 것으로서 주로 『세종실록』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며, 세종대 음악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악학편고』는 1707년(숙종 33)에 편찬한 악서로, 총 4권 3책으로 구성되었다. 권1에는 성기원류(聲氣源流)·자음원류(字音源流)·아음원류(雅音源流)·악부원류(樂府源流)가, 권2에는 속악원류(俗樂源流)·무의원류(舞儀源流)·무기(舞器)·무용(舞容)·잡희(雜戲)·악기(樂器) 등이 실려 있고, 권3에는 아악장(雅樂章)과 속악장(俗樂章) 상(上)이, 권4에는 속악장 하(下)와 가사(歌詞) 등이 실려 있다. 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속악과 악학 이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고려·조선 등으로 왕조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구분하여 각 시대의 속악을 게재하여 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 예로 유림가(儒林歌)는 고려시대, 만전춘(滿殿春)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제까지 국문학계에서 막연히 추측하여 ‘고려 가요(高麗歌謠)’ 혹은 ‘이조 시가(李朝詩歌)’로 분류하였던 것이 다소 잘못되었음을 이 책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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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편고』
『악학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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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습령』은 시조집으로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이라고도 한다. 모두 1,109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지은이를 알 수 있는 작품이 595수이며, 알 수 없는 작품이 514수이다. 병와 연보(甁窩年譜)에 따르면 편찬 연대는 1713년(숙종 39)이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시조 작품 가운데 영조 때 사람인 조윤형(曺允亨)과 조명이(趙明履)의 작품이 나오는 점과 곡목마다 끝에 이정보(李鼎輔)의 작품이 수록된 점으로 보아 편찬 연대를 『해동가요(海東歌謠)』보다 늦은 정조 연간(1776∼1800)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악학습령』 은 가장 오래된 시조집이며, 가장 많은 작품이 수록된 시조집으로, 이형상의 다른 유고와 더불어 『병와유고(甁窩遺稿)』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6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전기 유교와 불교에 두루 밝았던 김수온(金守溫)의 『식우집(拭疣集)』에는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가 기록되어 있어 불교 음악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提調)를 겸하고 『악학궤범』 완성에 공이 많은 성현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는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 『악학궤범』 서문, 『현금합자보(玄琴合字譜)』 서문을 비롯하여, 민간의 풍속을 읊거나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개인 문집 가운데 음악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룬 글도 있지만, 대다수의 문집은 음악의 중요성을 논하거나 『예기』 「악기(樂記)」에 나오는 전형적인 유교적 음악관을 시문 등에서 인용하고 있다. 대부분 음악을 성리학 중심의 예악 사상에 근거하여 정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가 『논어』 「태백」에서 말한 “시로서 뜻을 일으키고, 예로서 뜻을 세우고 악으로서 이룬다.”는 말처럼 시·예·악에 의한 인격 도야(人格陶冶)와 사풍 순화(士風醇化)에 따른 심성 수양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친화하면서 아정한 시문(詩文)을 짓고 읊조리며 음주가무(飮酒歌舞)와 청담(淸談) 등을 즐기는 풍치와 우아한 태도를 생활의 풍류(風流)라고 여긴 나머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매개로 하는 은유적인 음악 표현이 심심찮게 인용되곤 하였다.

이러한 점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반대하고 현실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조선의 변화와 개혁 사조(思潮)를 이끌었던 실학자의 개인 문집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특히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음악관이 아닌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하는 원시 유교적 관점에서 음악을 동경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곧, 고악(古樂)의 중요성을 깊 게 인식하고 고악의 회복을 통하여 음악의 본질인 심성 수양과 조화의 효용성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시 현실 사회와 학문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실학자들의 음악 사조로 더 발전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음악적 관심과 음악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식견은 분명 한국 음악학 발전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하였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 실학자의 개인 문집에서도 음악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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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속악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속악변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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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 음악을 다룬 개인 문집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가집(歌集)과 악장(樂章)이 있다. 이 노랫말에는 늘 아정한 시문을 벗해 가며 아름다운 정서를 가꾸어 가던 선비들의 품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또 제향이나 연향이 열릴 때 왕의 공덕과 문덕을 칭송하는 악장을 노래하는데,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의 악장과 속요(俗謠)를 모은 『악장가사(樂章歌詞)』, 『국조악장(國朝樂章)』, 『국조악가(國朝樂歌)』를 들 수 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歌曲源流)』는 우리나라 3대 가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안민영의 『금옥총서(金玉叢書)』와 『마옹만필(馬翁漫筆)』,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이라는 별호를 가진 편자가 엮은 『고금가곡(古今歌曲)』, 조황(趙榥)의 『삼죽사류(三竹詞流)』 등이 있다. 또한 저자를 알 수 없는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동가선(東歌選)』, 『가악보(歌樂譜)』,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이 있다. 여기에는 부모님을 노래하고, 자연을 노래하고, 간절히 보고 싶은 그리운 님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임금을 그리워하고, 그릇된 세상을 노래하고,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노랫말이 적게는 몇 십 곡에서 많게는 수백 곡씩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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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원류』
『가곡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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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노랫말은 각 지방의 민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옛날 『시경』의 제작이 그러하였듯이 채집한 민요는 민심을 살피고 정치의 잘잘못을 헤아리는 길잡이였으며, 여기에 ‘시’의 형식으로 품격을 갖춘 노랫말은 백성과 군주를 하나로 묶는 동화(同化)의 기능을 하였다. 『한서』 「예문지」에는 “옛날에 시를 채록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임금은 풍속을 살피고 득실을 알아 스스로 바로잡았다(古有采詩之官, 王者所以觀風俗, 知得矣, 自考正也).”고156)『한서』 권30, 예문지. 하였고, 『예기』에는 천자(天子)가 태사(太師)에게 시를 찬술하게 하여 민풍(民風)을 살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157)『예기』, 왕제(王制). 또한 “옛날 천자가 정사를 들을 때 공경 이하 여러 관원에게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古天子聽政, 使公卿至於列士獻詩).”는158)『국어(國語)』, 주어(周語). 『국어(國語)』의 기록에서도 민심을 시로 표현하고 시를 노랫말로 표상화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유풍은 이후 한(漢) 무제(武帝) 때에 악부(樂府)가 설치되고, 이 악부에서 채록한 시가를 악부시(樂府詩), 악부시가(樂府詩歌) 또는 ‘악부’라고 부르는데, 악부에 오른 민요시는 관현(管絃)에 올려져 주로 궁중 연회(宴會), 제사(祭祀), 조회(朝會) 등에서 부르는 노랫말로 삼았다.

중국 악부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악부시가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까지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소악부(小樂府) 11수와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의 6수이다. 이것은 우리말 노래를 7언 절구(七言絶句)의 한시로 옮겨 놓은 것으로 당시의 민요이다. 그러므로 악부시는 주로 백성의 삶, 인정, 세태, 전설, 효심, 부녀(婦女)의 정, 충성스러운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忠臣戀主之情), 세상사의 덧없음, 벼슬길에 당하는 위난을 읊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악부시는 민요나 속요를 다채롭게 엮은 것이어서 민심의 시대적 흐름에 따르는 사회적 동인(動因)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악부시는 17∼19세기에 이르러 지식층에 의해 관심이 고조되면서 다양한 노랫말이 창작되었다. 당시 잘 알려진 악부시로는 『동국악부(東國樂府)』·『해동악부(海東樂府)』·『영사악부(詠史樂府)』·『기속악부(紀俗樂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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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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