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5장 소리의 기록, 음반사
  • 1. 1896년 첫 녹음부터 1910년대까지
  • 1911년 일본 축음기 상회의 음악 쪽판
노재명

1910년 한일 병합(韓日倂合) 직후 일본 음반 회사인 일본 축음기 상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 회사는 미국 음반 회사보다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한일 병합으로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하였다. 일본 축음기 상회는 이런 여건을 충분히 살렸고 우리나라를 점차 음반 황금 시장으로 바꾸어 나갔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유난히 가무악(歌舞樂)을 좋아하였고, 일제 강점기 내내 일제는 유성기와 음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이전까지 많은 사람이 접하기 어려웠던 정악(正樂), 어전(御前) 광대들의 판소리 등을 대량으로 상품화하였다. 그에 따라 음반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부의 상징, 멋 내고 폼 낼 수 있는 명품, 소장 가치가 높은 예술품으로 급부상하였다. 아울러 유성기와 음반, 라디오의 보급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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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거의 대부분 일본 음반 회사였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일본 축음기 상회(독수리표 로얄 레코드 NIPPONOPHONE 쪽판·양면판, 남대문표 닙보노홍·닛뽀노홍, 일축 조선 소리반 와시표 적반, 콜롬비아)를 비롯해서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제비표 조선 레코드 NITTO), 합동 축음기 주식회사(비행기표 조선 소리판), 빅타(정규반 주니어 대중반 특별반), 폴리도르, 오케이, 시에론, 태평 레코드(다이헤이 기린 킹 레코드), 밀리온(고라이) 같은 회사가 있었다. 이 밖에도 돔보 조선 레코드(잠자리표), 쇼지쿠 레코드, 코리아 레코드, 뉴코리아 레코드, 리베라 레코드, 시스터 레코드, 케이아이 레코드, 디어 레코드, 금조인 특허 레코드 같은 회사가 1930년대부터 1948년 광복 때까지 우리 문화 예술 음반을 약간 제작하였다.252)노재명, 「한국 음반사」, 『월간 핫뮤직』 1992년 11월호 25, 마인 기획, 76∼82쪽.

일본 축음기 상회는 1911년부터 광복 때까지 레이블을 여러 번 바꿔 가며 우리나라 관계 음반을 냈다. 1911년에 독수리표 로얄 레코드(NIPPONOPHONE) 쪽판, 1913년에 독수리표 양면판, 1920년대 초반에 남대문표 닙보노홍과 닛뽀노홍(독수리표의 재판), 1925년에 일본 축음기 상회 조선 소리반 와시표, 1928년 미국 콜롬비아와 합작한 후에는 콜롬비아 정규반 흑반, 1929년에 일축 조선 소리반 적반(이글 레코드 대중반), 1933년에 콜롬비아 고급반(청반), 1934년에 리갈 대중반으로 레이블을 변경하며 우리 음악 음반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일본 축음기 상회는 일본 음악 음반 번호 체계로도 우리나라 관련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 회사는 1911∼1927년에 기계식, 1928∼1945년에는 전기식으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1911년 일본 축음기 상회에서 제작한 음반(독수리표 로얄 레코드 NIPPONOPHONE)에는 충청도 중고제(中高制) 판소리와 가야금의 명인 심정순, 경서도 명창 박춘재·문영수·김홍도, 피리 명인 유명갑 등의 녹음이 담겨 있다. 모두 국악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오늘날에는 국악 하면 전라도가 연상될 만큼 전라도 지역이 국악의 대명사,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축음기 상회에서 우리 음악 음반을 처음 생산한 1911년 당시만 해도 심정순, 박춘재 같은 명창의 충청도,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서도 민속 음악이 중앙 무대의 주된 대중 음악이었다.

일본 축음기 상회가 당시 사람들의 음반 구매 취향, 대중성, 회사 이미지, 향후 파급 효과를 모두 고려하여 고심 끝에 야심차게 기획한 첫 얼굴 상품이 바로 그 음반들이었고, 그처럼 치밀한 사전 조사와 전략은 기대 이상으로 맞아떨어졌고 상당히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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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음기 상회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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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당시 제작한 일본 축음기 상회의 우리 음악 쪽판은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 상당히 귀한 편이긴 하나, 유성기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뒤에 나온 독수리표 양면판(1913), 남대문표 닛뽀노홍(1920년대 초반)보다 많이 발견되거나 대등한 정도로 눈에 뜨인다. 이러한 점은 1911년 일본 축음기 상회가 우리 음악 음반으로 처음 출반한 심정순, 박춘재 음반의 인기와 탁월한 기획력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심정순이 음반을 취입한 이듬해인 1912년에 이해조(李海朝)가 그의 판소리 사설을 『매일신보』에 소설로 연재하였는데, 3월에 심청가를 ‘강상련’으로, 4월에 흥보가를 ‘연의 각’으로, 6월에 수궁가를 ‘토의 간’으로 실은 것도 바로 그러한 흐름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또 박춘재가 음반을 내고 나서 4년 후인 1915년에 그의 각종 민요 사설을 반영하고 사진을 실어 박승엽이 편찬한 잡가집(雜歌集)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가 유일 서관(唯一書館)에서 나왔고, 이와 유사한 잡가집도 여러 책이 출판되었다. 이는 당시 박춘재 소리의 음반 상품화 이유와 인기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출판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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