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5장 소리의 기록, 음반사
  • 2. 192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
  • 1920년대 중반 우리 음악 음반과 경성 방송국 개국
노재명

1925년 일본 축음기 상회(와시표)에서 판소리 명창 이동백·김창룡·강소춘, 판소리와 가야금의 명인 심정순과 그의 딸 심매향, 경서도 명창 박춘재·최섬홍·김패수·장금화·이진봉·백모란·길진홍, 가야금 명인 김해선, 가야금 병창과 민요의 명창 이초선, 국악 합주단인 조선 악단, 판소리와 민요의 명창 김추월·신금홍·박경화·권금주 같은 국악인을 비롯해서 영화 설명 명인 김영환, 동요로 유명한 이정숙, 그리고 안기영, 홍난파 같은 양악 전공자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심정순, 김해선의 가야금 산조 음반은 최초의 산조 녹음으로 추정되며, 1926년 일본 축음기 상회에서 제작된 이동백 도창 창극(導唱唱劇) 춘향전(18SP) 음반은 최초의 창극 녹음이다. 오늘날 이러한 음 반은 국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척 귀중한 실증적인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 음악을 기록으로 조금이라도 남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철저히 상업성을 계산하여 제작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악이 우리나라의 대중 음악이었기에 국악 음반의 상품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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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의 연설 음반
이상재의 연설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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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아회의 동요 음반
다리아회의 동요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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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음기 상회 다음으로 우리나라에 진출한 일본 음반 회사는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제비표 조선 레코드 NITTO)이다. 이 회사는 1925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우리 음악 음반을 발매하였고, 대부분 이기세의 기획에 따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한 이는 판소리 명창 김창환·송만갑·김창룡·강소춘·김록주·신금홍·박록주, 정가 명창 하규일·현매홍, 경서도 명창 박춘재·최섬홍·표연월·이월암·김죽사, 서도 소리와 단소의 명인 양우석, 가야금 명인 심상건·김해선, 대금 명인 최학봉·김영근, 해금 명인 지용구·김화녀, 피리 명인 이응룡, 양금 명인 정위정, 태평소 명인 박기동·진창규, 정가·경기 서도·남도 민요·판소리의 명창 박월정, 고수 한성준·김창근, 양악 전공자 윤심덕·윤성덕, 영화 설명 변사 김영환, 이상재(연설), 도월색(대중 가요), 다리아회(동요), 고한승(동화) 등이다. 이 회사는 여러 음악 중에서도 국악 음반을 가장 많이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최학봉, 김록주(김해), 현매홍, 이월암, 양우석, 김화녀, 이응룡, 정위정, 박기동, 진창규의 녹음은 유일하게 이 회사 음반에만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강소춘, 하규일, 박춘재, 김록주의 녹음이 걸작으로 평 가된다.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는 음반의 재질이 일본 축음기 상회의 음반에 비해 견고하지 못하고 두께가 얇아서 잘 깨지는 단점이 있었고, 시판하는 음반의 종류도 풍부하지 못하였으며, 일본 축음기 상회가 이미 음반 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기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8년에 일동 축음기 상회-콜롬비아와 빅타 음반 회사가 신기술인 전기식 녹음을 도입하여 음반을 취입하자 구식인 기계식 녹음을 하던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는 1929년 무렵에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떠났다. 기술 부족과 영업 부진이 주된 원인이었다. 한때 윤심덕의 가요 ‘사(死)의 찬미(讚美)’로 엄청난 이익을 보기도 하였으나 국악 음반으로는 별로 수익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잠깐 영업을 하다가 신기술에 밀려 철수한 이 회사의 음반은 당시 판매가 무척 부진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1900년대 쪽판 만큼 찾아보기 어렵다.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에 이어서 1926년에는 합동 축음기 주식회사가 비행기표 조선 소리판을 발매하였다. 이 회사 또한 일본 음반 회사인 것으로 보인다. 합동 축음기 주식회사에서는 경서도 명창 백운선·김월선·김산월·이난향, 남도 명창 안금향 등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 회사도 기술 부족과 영업 부진 때문에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떠났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음반이라고 하는 상품이 오늘날의 자동차처럼 돈이 되는 사업 대상으로 부상하자 음반 시장에 많은 업자가 뛰어들고 회사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기고 사라지며 상당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27년 2월 16일 경성 방송국(JODK)이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라디오 방송이 정식으로 개국한 것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였다. 당시 라디오 수신기는 수화기식과 여러 사람이 같이 들을 수 있는 전지식으로 확성기가 달려 있었다. 이후 1935년 9월에 부산 방송국 이, 1936년 11월에 평양 방송국이 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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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방송국 방송 장면
경성 방송국 방송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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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방송국 개국 이후부터 1940년대까지 라디오 방송용으로 많은 녹음이 이루어졌으나 6·25 전쟁 당시 대부분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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