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5권 기록과 유물로 본 우리 음악의 역사
  • 제5장 소리의 기록, 음반사
  • 4. 소리 기록의 혜택과 손실
노재명

유성기와 음반을 1877년에 발명한 에디슨은 수첩에다 그 발명품 용도를 음악의 녹음과 재생 등등이라 적었다. 녹음 기술의 출현 이전에는 음악을 그저 악보에 기록하거나 그림 또는 상여 꼭두 같은 조각품에 그 이미지를 나타내는 정도였다. 음반 매체의 탄생은 이후 인류 음악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세계 도처의 다양한 음악이 많이 사라지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 기술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예술 가운데 글, 그림, 공예, 건축물 이외에 음악이나 무용 등은 제대로 기록하기 어려웠다. 무용의 경우 벽화 등 그림으로 일부 묘사하기도 하였고 음악은 악보라는 수단을 강구하여 기록해 보기도 하였으나 연속 춤 동작이나 소리의 섬세한 음색, 성량, 강약 등을 풍부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고, 더구나 가무악을 기록물로 대량 생산하여 배포한다는 것은 사진, 음반, 영화 필름의 발명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최첨단 기계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예전의 가무악 분야가 그렇듯 대단히 취약하고 불편해 보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할 수 있었다. 또 훨씬 자연미가 있었다. 특히 우리 민속 음악은 성음(聲音), 농현(弄絃) 등을 중시하 는 특성상 악보로도 나타내기가 더더욱 어려웠고, 음반, 방송 같은 신기술도 더디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 사회의 음악 양상이 상당 부분 그대로 존재하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국악이 급격히 변질되거나 파괴된 것이지 그 이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음악이 고르고 왕성하게 전승되어 왔다. 지금이야 명창들도 녹음기를 앞에 놓고 판소리를 배우고 그러다 보니 판에 박힌 소리를 하게 되고 토속 민요조차 방송 매체 등의 발달로 개성이 사라지고 모두들 거의 비슷한 소리로 통일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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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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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어디를 가서 작은 마을의 민요를 살펴보더라도 무척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명창끼리 비교해 보아도 판소리가 완연히 달랐고, 똑같은 명창이 하는 소리인데도 어제 한 소리와 오늘 부르는 소리가 또 확연히 달랐다. 대명창의 경우 그 즉흥 작·편곡 수준이 곡마다 모두 경이로울 정도로 굉장하였다. 염라대왕이 삼촌일지라도 팔도 영웅호걸 어느 누구든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게 없었겠으나 녹음이라는 것이 없던 그 옛날 붙잡을 수도 없이 공중을 가르며 사라지는 대명창의 황홀한 소리는 또 얼마나 아까웠겠는가.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살았던 시절에는 사람 자체가 녹음기요 확성기이자 음파 탐지기처럼 감각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고 인간의 신체를 손상시키는 공해도 없었다. 그래서 명창과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명창도 많았다. 단 한 번 듣고 스승의 소리를 익혔다고 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야만 했 다는 원로 명창들의 증언이 많다. 귀명창들 역시 단 한 번 울려 퍼지다 그 즉시 사라지는 대명창의 소리를 각자 있는 힘껏 간직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여 가슴에 새겼다. 오늘날에도 광활한 초원 지대에 사는 몽골 인의 시력이 뛰어난 것처럼 전통 사회 인간의 청력은 생존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연 환경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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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흥갑의 판소리 장면
모흥갑의 판소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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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특히 가무악을 좋아하였고, 그것을 고도의 예술로 끌어올렸다. 쾌적한 자연 환경 속에서 영리한 이 땅 사람들이 탄생시킨 이상적인 문화였다. 대나무 마디, 소나무 나이테, 퇴적층 바위, 물소리, 새소리, 황소 울음소리, 천둥소리 등 대자연이 빚어낸 현상에서 규칙성과 원리를 관찰하고 응용하였다. 사람의 신체, 자연의 공기, 공간, 시간, 자연 소재 등을 고려하고 활용하여 만들어 가는 예술이 음악인만큼 자연에 대한 탐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할 것이다. 국악의 12음률, 우륵(于勒)이 지었다는 가야고 음악 12곡, 중모리 장단 12박 등이 우주 만물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단군 신화에 언급된 쑥과 마늘의 엄청난 약효가 오늘날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듯이 성덕 대왕 신종, 징, 꽹과리 방짜 악기의 우수성도 차츰 드러나고 있다. 이 또한 인간의 신체 리듬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나던 시절 자연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갓난아기가 성인은 느끼지 못 하는 음역(音域)을 들을 수 있듯이 공해가 없던 시절 신체적으로 지금보다 건강했던 전통시대 사람들은 소리에 대한 흡입력과 통찰력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나무 모양을 억지로 깎고 다듬지 않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휘어진 장승,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지은 재래식 화장실 구조, 자연의 일부로 어색함 없이 자리하고 있는 옛 정원 조성 문화, 철저히 자연 소재로 되어 있는 국악기, 이 모든 것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더불어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의 고운 심성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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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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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국악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이동백 명창의 판소리와 같이 자연미 넘치면서도 공력이 깃들어 있고 흥청거리는 여유와 멋이 있는 음악이 특히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음악의 독특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음과 최저음, 청아함과 텁텁함, 단맛과 쓴맛, 극약 처방까지도 고루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음악이다. 맑기만 한 플루트 소리보다는 문풍지 떨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갈대청을 청공에 붙여 청아함에다 곰삭은 오묘한 맛을 가미한 대금(大笒)이 오미(五味)를 갖춘 소리라 여긴다. 극도로 청아한 소프라노 소리보다는 그 상태에서 약간 쉰 듯한 느낌이 가미된 음색을 안정적인 소리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고대에는 광활한 영역에 걸쳐서 여러 국가와 문화 예술을 교류하여 타국의 음악을 향악화(鄕樂化)한 흔적도 많이 발견된다. 시대에 따라 집시 같은 음악가도 있었고 지역별 토박이 전문 집단도 있었으며 속세 에서 벗어나 수도승처럼 음률을 연마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판소리, 무속(巫俗) 음악, 영산회상(靈山會上), 정가(正歌), 범패(梵唄) 등의 음악을 통해 음파 치료 신념을 가지고 소리로 아픈 사람을 낳게 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실천하려고도 하였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여민락(與民樂) 역시 사랑과 평화, 홍익인간 이념과 맥을 같이한다. 오늘날 각종 음악 실험으로 밝혀지고 있는 음파가 인간과 동식물에 미치는 영향을 고대 사회 때부터 이미 이 땅의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전문 음악인이 아닌 평범한 시민의 시조창(時調唱)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풍류였다. 화살 같이 빨리 흘러가는 시간, 각박해져 가는 인생살이 속에서도 하염없이 느린 시조창을 느긋하게 불렀던 그 노인들의 해탈한 듯한 모습이 그립다. 땅이 방바닥인 것 마냥 편안히 딛고 앉아 하늘 우러러 땀 닦고 고개 숙여 나물 캐며 허공에 뿌리던 강원도 산골 아낙네들의 정선 아라리가 우리 음악의 진수가 아닌가 한다.

왕산악(王山岳)과 우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몇 끼를 굶은 상태에서 밥상 위에 국을 몇 번 데워 와도 단소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기가 막힌 가락을 한없이 뽑아내던 전추산(全秋山)이 타계한 지 반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그 또한 전설이 되었다. 득음(得音)에 이르게 되고 목표점에 도달하면 결국은 그 득도한 연주자 혼자인 것이다. 우주를 품은 채 홀로 적막공산(寂寞空山)에 거문고 소리 둥덩 슬기둥 슬갱 하며 무심코 하나, 둘 띄워 보는 것이다.

풍류 음악 자체가 어디 누구한테 보여 주기 위한 것인가. 모두가 자기 심신 수양을 위한 몸짓이었다. 사용하는 국악기의 음향 자체가 흥행을 목적으로 한 대형 공간용 도구가 아니라 극히 절제된 소리 구조로 되어 있다. 나무 등 자연 소재로 만든 국악기에서 뿜어내는 소리 자체가 산림욕 기능이 있다 할 것이다. 이렇듯 국악기 구조나 음악 자체가 애초에 크나큰 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음반 같은 대량 배포용 상품으로 제작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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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꼭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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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꼭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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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한 시골 살림살이 고된 일이 많고도 많은데 어찌 그리도 신명이 나는지 엄청난 노동을 하면서도 연신 흥을 돋우는 노래를 지어 가며 하는 지혜와 풍류 정신, 외유내강(外柔內剛)! 이것이 우리나라 모습이었다. 이런 민족을 일러 한의 민족이라니. 초상집에서도 망자가 좋은 곳에 갈 것이라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졌고 쓸어져 울고만 있지 않았고 며칠 밤 지새우면서 유가족을 위로하며 잔칫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춤추고 노래하였다. 상여에까지 광대, 악공을 조각으로 장식하여 망자가 저승 가는 길에도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이 주는 대로 밥 먹고 내 집에 누워 석양 바라보며 풀피리 불던 심성 곱고 슬기로운 한민족, 아무리 가난해도 풍류를 잃지 않았던 그 멋들어진 땅! 그것이 우리네 민족이 일군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자연미 넘치는 우리 음악이 음반의 출현과 함께 소비자의 서구적인 기호, 구매력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자극적인 음반 제품명, 음악 장르의 세분화, 거기에다 방송 기술까지 덧붙여짐에 따라 통속적으로 변이되고 변화무쌍하던 다양한 음악성이 획일화되고 점차 규정화·규격화되는 양성을 보이게 되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듯이 인간이 그토록 염원하고 꿈꾸었던 소리의 기록을 통해 혜택도 누렸지만 손실도 있었던 것이다.

기술 개발을 통해 기록 용량도 계속 확장되었다. 한 쪽에 몇 글자 적지 못하였던 책에 점차 많은 글과 선명한 인쇄를 끝없이 추구해 왔듯이 유성기 음반을 시작으로 최근 DVD에 이르기까지 1분, 3분, 30분, 1시간, 이제 몇 시간 분량도 하나의 음반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분석 결과 요즘 책은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고 당장은 선명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예전에 조금밖에 기록하지 못한 한지(韓紙)로 만든 책의 수명을 따라갈 수 없듯이 음반도 유성기 음반이나 장시간 음반은 몇 분에서 몇 십 분밖에 담지 못하지만 음질의 변질이 극히 적고 감상자의 인체에 유익한 반면 콤팩트디스크는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으되 수명이 길지 못하고 수록되어 있는 디지털 녹음 자체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이 역시 사람의 끝없는 욕심이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녹음, 동영상 기록이라는 것이 발명가, 기업, 소비자에게는 신비, 소유욕의 대상이지만 예술가에게는 족쇄(足鎖)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번 기록되어 대량 생산되면 잘못 연주한 것이라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 예술가에게는 악몽이요 큰 치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고 집요하고 철저히 기록된다는 것은 사회가 너무 빡빡하고 빈틈이나 여유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더 나아가 도청, 몰래 카메라 등과 같이 악의적인 용도로 이러한 기록 매체를 사용하여 사생활을 침해한다든가, 단체나 국가 간의 경쟁에 활용하는 병폐도 증가하고 있다. 또 책과 마찬가지로 음반도 소비자 측면이나 질적 우수성보다는 기업이나 예술가 개인의 경력과 출세의 도구로 대량 생산되는 사례가 늘어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유성기 음반 쪽판이 양면판으로, 깨지지 않는 장시간 음반으로, 엄청난 양의 저장이 가능한 콤팩트디스크와 DVD로 계속해서 인간의 욕망은 채웠지만 이처럼 잃거나 도리어 해가 된 부분도 많았다.

앞으로 새로 녹음을 하여 음반화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와 병행하여 과거에 기록된 여러 음향 영상물을 수집, 연구, 보존하는 일 또한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더 많은 분야별 음향 영상 자료관(아카이브) 건립이 시급하다. 이는 콤팩트디스크 자판기, 인 터넷 등이 주도하게 될 21세기 음반 시장에서 우리나라 음반 산업과 문화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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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음반
1960∼1970년대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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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남아 있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필름을 찾아오기 위해 몇 백 억의 보상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당장 시급한 것은 지금 눈앞에서 길거리 쓰레기통 옆에 내버려지거나 방치되어 있는 음반과 영상 자료들의 보관 문제 해결이다. 불과 10∼20년 전의 음반 마스터 테이프도 분실된 것이 허다한 현실에서 앞으로 또 다른 자료가 ‘아리랑’ 필름처럼 다른 나라 사람 손에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었던 빅타, 콜롬비아의 원반 수입이야 후손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도 우리 스스로 만들었던 음반까지도 장차 수입을 해야 한다면 이는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박용찬이 평생 모은 음악 자료를 아낌없이 문예 진흥원에 기증한 것은 여러 사람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귀중한 자료를 개인이 보관하기보다 좋은 시설을 갖춘 공공 기관에서 관리한다면 자료를 보존하기 쉽고 영구히 후세 사람이 활용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학 자들이 평생 애써서 수집한 음악 자료를 선뜻 세상에 내놓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보관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 연구가가 일생 동안 애써서 수집한 자료가 또다시 중고 시장에 흘러나오는 사례가 종종 목격되고 있다. 음향 영상 자료를 보관하는 공공 기관이 우선 과거에 기증 받은 자료를 성의 있게 관리하여 신뢰도를 높여야 앞으로 자료 기증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음향 영상물을 보관하는 공공 기관은 이제 기증 받는 자료를 관리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자료를 찾아나서야 한다. 과거에 녹음되거나 녹화된 테이프와 음반 등을 찾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발굴할 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산재해 있다. 지금도 문화재급의 음반이 중고 음반 시장에 출현하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테이프 자료도 많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공공 기관이 그러한 자료를 직접 나서서 수집하지 않고 있다. 우선 지금 이 시간 제작되고 있는 음반부터라도 수집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음반 역사가 100년을 넘어섰다. 그 나이에 걸맞게 수백 개의 음반 회사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역사를 담고 있는 음반들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제대로 된 음향 영상 자료관은 전무한 형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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