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농경을 처음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이다. 신석기시대의 농기구는 대부분 돌로 만든 것인데, 굴지구(掘地具), 수확구(收穫具), 탈각구(脫殼具), 저장·조리구(貯藏調理具)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굴지구는 땅을 파고 가는 기경(起耕) 도구로서 돌괭이, 돌삽, 돌보습, 뿔괭이(뒤지개) 등이 있고, 다 자란 곡물을 수확하는 수확구로는 낫과 반달 모양 돌칼이 있다. 또 수확된 곡물의 껍질을 까고 전분을 만드는 탈각구로는 갈판과 갈돌, 돌공이와 돌절구 등이 있고, 이들을 조리하거나 저장하는 데에는 토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시대에도 신석기시대의 농기구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중에 벼농사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반달 모양 돌칼이다. 그 가운데 삼각형의 양변에 날을 세운 것으로 양변의 날을 서로 반대되도록 간 엇날인 삼각형 모양의 돌칼이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와 후기에 서남부 지방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벼농사가 성행함에 따라 벼농사 전용으로 나타난 새로운 형식이다. 반달 모양 돌칼은 화북 농경 문화의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데, 신석기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청동기시대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하다가 철기가 생산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철기는 중국 전국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 철부(鑄造鐵斧)를 위시해 농·공구류가 우세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 따비, 괭이, 쇠 낫이 나타나면서, 따비-괭이 농사가 경작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갈이(따비·괭이)-걷이(쇠 낫)의 과정이 철제 농기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나무 괭이, 괭이자루, 나무 쇠스랑, 낫자루 등의 목제 농기구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원후 3세기경에는 U자형 따비와 쇠스랑의 출현으로 논농사의 작업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 따비는 땅을 일구고 알뿌리를 캐는 농기구이고, 쇠스랑은 흙을 부수고 땅을 고르는 농기구이다. 무안 양장리에서는 갈아진 논의 표면을 평탄하게 고르는 작업을 하는 고무래도 발굴되었다.
4세기 후반경이 되면 따비가 없어져 U자형 따비로 대체되고, 새로이 살포가 나타난다. 살포는 논에 물꼬를 트거나 김을 매는 농기구로, 중국과 일본에는 잘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특유의 농기구이다. 살포가 나타나면서 수장층의 농기구는 U자형 따비·쇠스랑(갈이)-살포(김매기)-낫(걷이)이라 는 완성된 농작업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502년(지증왕 3)에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15)『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3년. 쇠보습의 발견으로 확인할 수 있다.
7세기 후반에 이르면 보습의 출토 양이 크게 증가하고, 볏이 함께 출토된다. 쟁기에서 볏은 간 논 전체를 다시 갈아 뒤집는 전면 반경(全面反耕)과 깊이갈이를 할 수 있게 하여 토양의 거름 능력을 높이고 논의 이어짓기와 밭의 돌려짓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또 잡초가 많이 자라는 한반도의 기후 조건으로 인해 김매기를 하는 호미가 나타나고, 자루까지 쇠로 만든 낫도 등장하여 벼 포기까지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농기구의 형태는 이후 고려·조선시대에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