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3. 벼농사의 발전과 확산
  • 벼의 저장
박찬흥

벼를 저장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벼 자체로 저장하는 방법, 볏단 채 저장하는 방법, 탈곡하여 현미로 저장하는 방법이다. 그 가운데 볏단 채 저장하는 방법은 3년 정도 장기간 보관에 유리하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어 고대 일본에서도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필요 이상의 보관 면적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보관 방법은 아니었던 듯하다. 또 탈곡하여 현미로 저장하는 방법은 벼로 저장하는 것보다 50∼60% 분량에 지나지 않아 공간 활용에는 유리하지만, 물리적 손상이나 해충 등에 의한 피해가 크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벼 낟알 채 저장하는 방법을 가장 널리 이용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광주 신창동 유적의 경우 저습지에서 많은 양의 벼 껍질이 퇴적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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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된 벼 껍질
퇴적된 벼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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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저장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벼를 건조시킨 다음 그대로 저장하였지만, 그을려서 저장하는 방법도 이용한 듯하다. 탄화미나 탄화벼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쌀 또는 벼가 불에 탄 것은 정말로 집에 불이 나거나 하여 불탄 경우도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에서 썩으면서 검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밖의 경우라면 불에 태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벼를 탈곡하기에 앞서 좋지 않은 싹을 없애고, 이삭에서 탈곡하기 쉽기 때문에 이삭에 불을 놓아 구운 것으로, 불이 강하여 중도에 타 버린 것이 불탄 쌀이나 벼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불에 탄 쌀이나 벼가 발생한 이유는 벼 줄기를 태우고 벼만 간추려 탈곡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에 넣은 이유는 건조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쌀이 대부분 불에 탄 상태로 출토되었다. 불탄 쌀이 많은 것은 벼를 불태워 쌀에 있는 수증기를 탈취하고 건조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해충의 폐해를 피하고 장기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화를 한 뒤 저장하는 방법은 일본에서도 대부분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벼농사 기술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벼를 태우면 종자벼로는 사용할 수 없다. 아마도 먹기 위한 주식용, 종자벼, 장기 보존 벼는 각각 용도에 맞게 별도로 처리하여 보존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곡물을 보존하는 방법은 토기에 담아서 집 안에 저장하는 경우, 집 밖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토기·목기·바구니 등의 용기에 곡물을 담아 두는 경우, 구덩이를 파고 안에 저장하는 경우 등이 있으며, 해충이나 동물의 피해를 막거나 썩지 않도록 창고 같은 별도의 저장 시설도 만 들었다. 쌀도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 이래 밭과 논에서 추수한 뒤에 일상용으로 먹기 위해 저장하기도 하고, 이듬해 농사를 위해 특별히 종자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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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모양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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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저장하는 시설의 형태와 방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크게 옥내 저장과 옥외 저장으로 구분된다. 옥내 저장은 토기 등의 용기를 이용하여 집터 바닥이나 바닥을 판 구덩이에 토기를 넣고 그 안에 곡물을 저장한다. 주로 일상적으로 필요한 곡물을 저장하는 성격이 강하다. 옥내 저장은 신석기시대에 토기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청동기시대를 거쳐 고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곡물 저장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청동기시대의 저장 시설로는 저장 구덩과 고상 창고(高床倉庫)가 주목된다. 저장 구덩 또한 집 안에 있는 옥내 저장 구덩과 집 밖에 있는 옥외 저장 구덩이 있다. 관창리 유적에서 발견된 옥내 저장 구덩은 집터 벽면에 작은 구멍을 파고 저장하는 것이다. 옥외 저장 구덩은 자루형으로 저장 구덩을 파고 저장하는 형태이다. 송국리 유적의 옥외 저장 구덩에서 불에 탄 탄화미가 출토되어 벼를 저장하는 장소로 이용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저장 구덩은 온도와 습도 조절이 쉽기 때문에, 고상식 창고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초창기에 비교적 많이 이용되었던 듯하다.

저장 시설 가운데 일반적으로 이용한 것은 고상 창고였다. 고상 창고는 물리적 손상이 적고 수분을 적정량으로 유지시켜 줌으로써 해충을 예방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더라도 쌀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상 창고는 미사리·관창리·장천리 유적 등의 마을 유적에서 전국적으로 확인되는데, 청동기시대 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 중기 이후에는 마을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고상 창고의 관리는 한 가옥당 하나의 창고를 갖는 형태일 수도 있고, 몇 개의 가옥이 모여 공동으로 관리하였을 수도 있다. 관창리 유적에서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고상 창고가 배치되었다. 논과 가까운 곳에는 장방형(長方形) 고상 가옥이 대여섯 동, 가옥이 모여 있는 마을 집락의 중앙에 원형(圓形) 고상 가옥이 세 동, 토기 가마가 집중되어 있는 가장 높은 곳에 15∼17동이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집락 중앙에 있는 원형 고상 가옥은 창고라기보다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적인 장소, 즉 집회나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창리 유적의 고상 창고는 대략 20∼23동 정도이고, 집터는 모두 100기이다. 그렇다면 다섯 가구당 한 동의 고상 가옥이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5∼8기의 집터가 한 단위를 이루는 집락임을 고려할 때, 20여 가족 집단이 모여 하나의 취락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상 창고가 소가족별 공간에 따로 있지 않고, 독립된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가족 집단별 생산·관리가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전체 취락 내의 조정 아래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고상식 창고와 논농사는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화북 지방을 중심으로 혈창(穴倉)이 발달한 반면, 벼농사가 발달한 화중 지방과 화남 지방에는 고상식 창고가 널리 쓰고 있다. 이는 벼 문화권과 고상식 창고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고상식 가옥의 규모는 대개 2×3칸 또는 1×(1∼5)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벼나 쌀이 토기에 바닥 등에 눌러 붙어 있는 압흔(壓痕) 토기를 통해, 이 시기에 토기를 만든 장소가 벼를 탈곡하거나 저장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주로 여성이 토기를 만들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관창리 유적에서 발견된 가마터와 창고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27)이홍종, 앞의 글 ; 복천 박물관, 『선사·고대의 요리』, 2005.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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