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4. 쌀과 식생활
  • 쌀과 오곡
박찬흥

원시 사회에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식량은 도토리로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주요한 식용 열매였다. 그 뒤 곡물을 통해 영양소를 섭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소비하는 칼로리의 88%와 단백질의 80%를 식물로부터 섭취한다고 한다. 특히 단백질의 55%를 종자형(種子型) 주식인 밀, 쌀, 옥수수에서, 13%를 콩류에서, 나머지 20%를 동물로부터 공급받는다.

신석기시대 이래 농경 사회에 들어서면서 피, 기장, 조, 수수 등이 주요 곡식으로 재배되었다. 그 뒤 맥류(麥類), 즉 보리와 밀이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5∼6세기까지 조(粟)와 맥(麥)에 대한 기사가 농사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까지는 조와 보리·밀이 가장 주요한 곡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오곡(五穀)’이다. 오곡이란 ‘모든 곡물’이라는 의미와 함께 ‘특정한 다섯 가지 곡식’이라는 뜻도 있다. 다섯 가지 곡식이라는 뜻일 경우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중국의 여러 문헌에 따르면 오곡에 벼를 포함시키기도 하고 제외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도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의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부여, 동옥저 등의 땅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에 알맞았다는28)『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부여·동옥저 ;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부여·동옥저. 기록이 보여 중국과 마찬가지로 오곡을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주몽이 떠날 때 어머니 유화 부인(柳花夫人)이 오곡 종자를 싸주었다고 하고, 광개토왕비의 비문에도 “오곡이 잘 익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여기서의 오곡은 곡식 일반을 뜻하는 듯하다.

그런데 『삼국지』에 변진은 “토지가 비옥하고 좋아 오곡과 벼(稻)를 심기에 알맞다.”고29)『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변진.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적어도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에서는 오곡 안에 벼가 포함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여, 고구려에서 벼(稻)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북쪽 지역이기 때문에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백제에서는 33년(다루왕 6)에 논을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 연대를 그대로 믿는다면 이미 1세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관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 저수지나 제방 축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벼농사 때문일 것이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에서 벼농사가 중시되면서 쌀의 생산은 증대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식생활에서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즉, 쌀이 주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남북국시대가 되면 신라에서 쌀은 여러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농경이 보급되기 전에는 그날 얻은 먹잇감 가운데 가장 양이 많은 것이 주식이었으나, 농경이 보급되면서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곡물이 주식이 되고, 동물성 식품은 부차적인 존재로 떨어졌다. 곡물 생산의 증가는 주·부식(主·副食)의 분리와 또 소금의 생산을 가져왔다.

주·부식의 관념은 특히 벼 문화권에서 현저하다. 쌀의 아미노산은 질 적으로 비교적 우수하여 양만 많이 먹으면 칼로리뿐만 아니라 단백질도 질과 양을 채울 수 있다. 벼 문화권에서는 대량의 쌀밥과 소량의 부식이라는 식사 패턴이 현저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식사 자체를 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과 부식이 분리되는 것은 삼국시대 후반기, 즉 6∼7세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주식인 밥은 쌀을 비롯한 곡물이었고, 부식인 반찬은 장, 젓갈, 김치, 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일상식(日常食)의 기본으로 정착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