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4. 쌀과 식생활
  • 쌀의 취사와 조리
박찬흥

청동기시대의 취사도구(炊事道具)는 독이나 바리 등 주로 중형의 토기였는데, 토기 표면의 그을린 흔적이나 안쪽 면에 붙어 있는 불탄 물질의 부착 상태를 보면, 그 용기의 기능뿐만 아니라 무엇을 조리하였는지까지 추정할 수 있다. 또 조리용 토기의 바깥 면에 남아 있는 흔적을 관찰하면 당시 화로(火爐) 시설이 어떠하였는지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가 되면 타원형 수혈(竪穴)이 있는 방형 집터의 주변에 독립된 조리 공간으로 야외에 화로를 설치하였다.

토기에서 무엇을 조리하였는지는 그 토기 안에 남아 있는 음식의 불탄 흔(痕)으로 지방산 분석을 통해 밝혀 낼 수 있다. 이러한 조리흔(調理痕)이 남아 있는 토기는 훌륭한 연대 측정 자료가 된다. 또 조리할 때 음식이 밖으로 넘쳐흐르면서 외부의 열에 의해 불탄 부착물이 그대로 토기 표면에 종종 남곤 한다. 대개 뚜껑을 닫고 요리하는 쌀의 경우 흔적이 많고, 죽이나 국인 경우는 대부분 수증기만 배출되고 내용물이 있더라도 끓자마자 뚜껑을 열어 놓아도 되므로 거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따라서 흔적이 남아 있는 토기는 대부분 밥을 짓는 데 쓴 것이고 그렇지 않은 토기는 국이나 죽을 끓일 때 이용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기원 전후 시기가 되면 뚜껑의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크기도 대형·소형 등 다양하다. 토기의 뚜껑은 곡물 또는 액체의 저장에도 사용하였고, 동시에 취사할 때에도 사용하였을 것이다.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나무 뚜껑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에 다양한 크기의 토기와 목제 뚜껑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은 조리할 때 뚜껑을 쓴 유력한 증거로 판단된다. 조리할 때 뚜껑을 사용하면, 열이 유출되는 것을 막아 주어 가열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동시에 새로운 요리의 등장 및 요리의 영양가를 증대시켰을 것이다. 뚜껑이 중요한 취사도구로 정착하는 것은 쌀로 죽을 끓이는 형태에서 밥으로 상식(常食)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죽과 같은 상태의 완성물도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 등장하는 시루는 쌀이나 다른 음식을 쪄서 먹는 취사도구였는데, 출토된 예가 별로 많지 않아 사용한 빈도수는 그리 높지 않았던 듯하다. 제사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떡 등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쌀이나 기타 곡물을 쪄서 조리한 것이 아니라 죽이나 밥의 형태로 조리해서 먹었을 것이다.30)이홍종, 앞의 글.

취사 장소는 공동 취사와 개별 취사의 가능성이 모두 있는데, 노지(爐址)와 부뚜막이 존재하는 주거지는 개별 취사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4세기 초∼3세기 말경에 철기 문화가 수용되면서 주거 구조에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집 안에 온돌 시설과 더불어 부뚜막을 만들었다. 온돌 시설 입구에 부뚜막을 설치하여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하면서 주거의 온도도 높이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었던 것이다. 부뚜막의 설치는 조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부뚜막의 등장과 더불어 찜 조리기인 시루를 상용하였고, 시루의 보조 도구로 독과 항아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밥을 매일 먹었다면 수저가 필요하였을 텐데, 현재까지 삼한시기의 수저는 확인된 예가 없다. 아마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어 없어졌을 가능 성도 있다. 만약 죽으로 먹었다면 국자로 먹었을 것이다. 삼한시기의 국자로는 흙으로 만든 국자나 나무로 만든 국자가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 요즘 숟가락 크기와 비슷하고 손잡이 길이도 길어야 5㎝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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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수저
무령왕릉 출토 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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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가 되면 솥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미 1세기 초인 기원 21년(대무신왕 4)에 고구려의 병사들이 솥에다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31)『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4년. 또 357년(고국원왕 27)에 만든 안악 3호분의 벽화 가운데 주방 그림에서 부뚜막에 쇠솥을 걸고 그 위에 흙 시루를 얹어 요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의 쇠솥과 시루가 고구려의 관방(關防) 유적인 서울 구의동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병사들이 주둔하면서 쇠솥과 시루를 이용하여 음식을 해 먹었던 것이다.

백제의 경우, 몽촌토성에서 5세기 초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에서 쇠솥 파편이 출토되었고, 4∼5세기에 조성된 청주 신봉동의 백제 고분군 인근에서 무쇠솥 다섯 개가 나란히 포개진 채 발견되었다.

신라에서는 5세기 후반이 되면 솥이 등장한다. 김해 예안리 Q호 독관에 사용된 솥이나, 경주 황남 대총 남분, 전 미추왕릉 7지구 5호묘, 양산 부부총 등의 무덤에서 쇠솥이 나왔다. 이들 쇠솥에는 다리를 떼 낸 항아리 받침대의 바리가 뚜껑으로 덮여 있다. 쇠솥이 뚜껑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쇠솥에 밥을 지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쇠솥에 밥을 하게 되어 누릉지와 숭늉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32)복천 박물관,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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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 벽화의 부엌과 창고 모습
안악 3호분 벽화의 부엌과 창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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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솥과 시루
쇠솥과 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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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義湘, 625∼702)의 제자인 진정(眞定)의 집은 가난하여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직 다리 부러진 솥 한 개가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33)『삼국유사』 권5, 효선(孝善)9,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 이렇게 쇠솥이 널리 보급되면서 불을 때서 밥을 짓는 것이 좀 더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물을 넣고 삶거나 끊이는 자(煮)나 팽(烹)과는 다르다. 먼저 쌀을 씻고 솥에 담고 물을 부은 후 끓이면 솥 안에 수증기가 가득 차면서 찌는 상태가 되고 뜸을 들이면 수분이 더 줄어들어 밑바닥이 노릇노릇하게 눌어서 누룽지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밥은 삶고 찌고 태우는 세 단계를 거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법으로 밥을 짓지만,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찜통에 쪄서 먹는 곳이 많고, 서아시아에서는 기름을 넣어 볶다가 수프를 넣어 익히는 필라프(Pilaf)를 만들 어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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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출토 청동 솥
천마총 출토 청동 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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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끓여서 뜸을 들이는 밥 짓기는 우리나라에서 창안된 듯하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저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따르면, 청나라 학자 장영(張英)이 “조선 사람은 밥을 잘 짓는다. 밥알이 윤기가 있으며 부드럽다. 우리 동쪽 사람(즉 조선 사람)이 지은 밥은 천하에 없다. 지금 사람도 밥 짓기에 다른 법이 없다.”고34)서유구(徐有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권42, 정조지(鼎俎志) 제2. 칭송할 만큼 우수하였다. 이렇게 밥 짓기를 잘하게 된 것은 좋은 무쇠솥이 일찍 일반화됨으로써 끓여 짓는 밥 짓기 법이 널리 퍼졌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쌀과 관련된 음식으로 떡을 들 수가 있다. 설이나 한가위 등의 제사나 의례 등에서 빠지지 않는 떡은 시루로 쪄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쌀 이외에 밀가루로도 떡을 만들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쌀을 위주로 떡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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