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4. 쌀과 식생활
  • 식생활에서 쌀의 비중
박찬흥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확대되면서 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주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일상적이고 당연한 의미로 사용되는 ‘주식’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 주식의 기준은 밥상에 오르는 횟수인가 아니면 먹는 양인가? 대다수 사람들이 먹는 것이 주식인가, 아니면 양에 관계없이 항상 밥상에 오르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쌀이 식생활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였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또 쌀이 식생활에서 차지한 비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위 면적당 어느 정도 수확이 가능하였고, 이것이 전체 섭취량에 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인지를 검토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

일본의 토로(登呂) 유적에 대한 분석 결과, 논 1평당 수확 가능한 양은 현미로 약 5홉 정도이며, 쌀만 먹었다고 가정할 경우 1인당 하루에 필요한 현미의 양은 약 3홉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1홉을 현재의 중량으로 계산하면 약 143g 정도이므로, 하루에 필요한 양은 430g, 1년이면 157㎏에 이른다.

이러한 분석을 관창리 유적에 적용해 보면, 경작 가능한 논 면적은 약 7,000평, 산출량은 3만 5000홉(5,000㎏)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주거지가 약 20기 정도이므로, 주거당 평균 인원을 3.5명으로 보았을 때, 전체 구성원은 70명이 된다. 이들이 1년 내내 쌀만 먹었다고 가정할 경우,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은 약 7만 6000여 홉(약 1만 1000㎏)이 되어, 전체 소비량 가운데 절반 정도가 쌀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5)이홍종, 앞의 글.

이러한 분석에 대해, 당시의 벼농사 기술 수준을 고려해 볼 때 관창리 유적의 쌀 생산량이 실제보다 과다하게 계산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전체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다른 곡식과 혼식하여 쌀을 늘 먹었다는 결론이 되는데, 우리가 매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은 1970년대에 와서야 가능하였기 때문이다.36)곽종철, 「우리나라의 선사∼고대 논밭 유구」, 『한국 농경 문화의 형성』, 학연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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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의 기생충 알-회충알
신석기시대의 기생충 알-회충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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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충알
편충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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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쌀 생산량의 규모가 전체 음식물 섭취량의 절반이었든 아니면 절반 이하였든지 간에, 적어도 쌀밥이 일정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는 의문의 여지는 없다. 쌀밥은 식생활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광주 신창동 유적의 토양을 분석한 결과, 많은 회충알과 편충알이 검출되었다. 기생충은 농경의 시작에 따 른 정착 생활과 인구 집중으로 축적되는 배설물에 의해 오염된 식료를 섭취함으로써 생기는 인간 병충(人間病蟲)이다. 특정 유적에서 회충, 편충 같은 기생충이 확인된다면, 이는 곧 농업을 생업 기반으로 하여 계속적인 정착 생활을 하였음을 뜻한다. 일본에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정착 생활이 시작되는 야요이시대 이래 취락지 둘레의 도랑이나 화장실 유적의 퇴적물에서 회충알, 편충알이 보편적으로 검출된다고 한다. 벼농사의 시작과 함께 정착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기생충이 급격히 만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기생충 알을 통해 당시 신창동에 살았던 사람들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안정된 정착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37)국립 중앙 박물관, 앞의 책, 46쪽.

청동기시대를 지나 삼한시기에 들어오면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증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쌀의 등장으로 도토리 등의 견과류(堅果類)가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였을 것은 틀림없으나, 필요한 만큼 충분히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잡곡과의 혼식(混食)이 생기게 되었고 잡곡과 채소류에 대한 의존도도 여전히 높았을 것이다.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붙어 있는 불탄 탄화물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쌀과 조 또는 피를 함께 섞어서 끓였다고 한다. 밥을 요리할 때 쌀만으로 이루어진 요리가 50%, 쌀과 잡곡으로 혼합된 요리가 20%, 그 밖이 30% 정도의 비율이었다. 즉, 쌀과 다른 곡물을 섞어서 밥 또는 죽을 만들었으며, 혼식을 하였던 것이다.38)복천 박물관, 앞의 책.

이러한 경향은 쌀이 여러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물론 지배층은 쌀을 주식으로 먹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지배층 가운데 농사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 명이고, 하호(下戶)는 멀리서 쌀 양식(米糧)·생선·소금을 공급한다고39)『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고구려. 하였으니, 지배층은 쌀을 양식으로 먹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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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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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는 처음에는 하루에 쌀 세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먹지 않고 아침·저녁만 먹었는데, 먹은 양을 계산해 보면 하루에 쌀 엿 말, 술 엿 말, 꿩 열두 마리를 먹었다고 한다.40)『삼국유사』 권1, 기이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하루 세 끼를 먹었을 때에는 한 끼에 쌀 한 말과 꿩 세 마리를 먹었고, 두 끼 식사로 바꾼 뒤에는 한 끼에 쌀 세 말, 술 세 말, 꿩 여섯 마리를 먹은 셈이다. 대단한 식사량이다.

일반 백성들도 이렇게 쌀만을 주식으로, 세 끼 식사를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의상의 제자 진정이 출가를 할 때, 어머니가 집 안에 있는 쌀자루를 털어 쌀 일곱 되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주먹밥 일곱 개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41)『삼국유사』 권5, 효선9, 진정사효선쌍미. 쌀 일곱 되로 주먹밥 일곱 개를 만들었으니, 한 끼에 주먹밥 하나, 즉 한 끼에 쌀 한 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은 품을 팔아 생활하던 가난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난한 일반 백성들까지도 쌀은 늘 먹는 주식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707년(성덕왕 6)에 한 해 벼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이 심해지자, 한 사람에게 하루 세 되씩 조(租)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42)『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 진 정이 한 끼에 주먹밥 한 개, 즉 쌀 한 되를 먹었으니, 당시 백성들은 한 끼에 한 되씩 하루 세 끼 식사를 한 것을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조(租)를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으므로, 백성들도 쌀을 주식으로 먹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707년에 나누어 준 것이 쌀이 아니라 조(粟)로 나와 있다.43)『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6년 또 『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민에 대해 진휼(賑恤)하거나 상으로 내려줄 때는 보통 조(粟)를 내려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왕족이나 귀족에게는 예외 없이 조(租), 즉 쌀을 내려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성덕왕 때 내려준 곡식은 아마 쌀보다는 조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당시 이미 쌀은 여러 곡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곡물의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피지배층 일반이 널리 주식으로 먹을 만큼 충분히 생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의 경우도 중세에는 쌀이 궁정을 비롯해서 상류 계급, 무사, 부유한 상인들에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확실히 주식이었지만, 그 외의 계층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쌀 문화란 영주 문화, 즉 지방 호족과 상류 계층의 문화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쌀은 양적·질적인 측면에서 지배층만의 문화였을 가능성이 크고, 고구려, 백제에서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국민들 대다수가 쌀을 주식으로 늘 먹게 된 때는 20세기 후반이다. 일반 백성들은 보리, 조 등의 잡곡을 주식으로 먹었을 것이고, 쌀을 먹더라도 쌀만을 주식으로 먹는 경우보다는 쌀과 다른 곡식을 함께 섞어서 먹는 혼식이 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진정의 어머니가 진정에게 쌀만으로 밥을 해준 것은, 아마도 출가하는 아들에게 특별히 마지막으로 주먹밥을 해주는 경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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