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6. 조의 수취와 지급
  • 조의 지급
박찬흥

조(租)는 관리의 녹봉(祿俸)으로 지급되거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내려졌다. 689년(신문왕 9)에 내외의 문무 관료들에게 기존에 지급하였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녹봉으로 조를 지급하였다. 767년(경덕왕 16)에 월봉(月俸)으로 조를 지급하는 것을 폐지하고 녹읍을 다시 내려주었으니, 신라에서는 689∼757년 사이에 조를 관리에게 월봉으로 지급하였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관리에게 월봉으로 쌀을 지급하였기 때문에, 신라도 그러한 급여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언고략(東言考略)』, 『월여농가(月餘農歌)』 등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는 벼의 다른 명칭인 나락이라는 말이 ‘나록(羅祿)’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에서 관리의 녹봉으로 알곡식인 미(米) 대신에 겉곡식을 주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라는 것이다. 곧, 신라(新羅)에서 녹(祿) 으로 준 것이므로 나록(羅祿)이라 이름하였고, 나록이라는 말이 변해서 ‘나락’이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이 옳다면, 신라에서 관료에게 조를 지급한 것에서 나락이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재미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우리 고유의 말을 한자로 설명하려다 잘못된 것인 듯하다. 아마도 나락은 ‘낟알’에서 온 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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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
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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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가반부속문서의 뒷면에는 제11위의 관등인 내말(乃末)과 제12위의 관등 대사(大舍)인 관리들이 ‘상미(上米)’, 즉 상등품의 쌀 2섬(石)씩을 각각 녹봉으로 지급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녹봉으로 지급된 조(租)는 겉곡식이 아니라 알곡식 미(米), 그것도 상등품의 쌀이었다.

한편, 조(租)는 특별한 공적이 있거나 크게 칭찬할 만한 일이 있을 경우에 하사품으로 지급하였다. 668년(문무왕 8)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운 장수들에게 일길찬(一吉飡)을 주면서 조(租) 1,000섬을 주었고,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자 향덕(向德)과 효녀 지은(知恩)에게도 조(租)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조는 아무에게나 지급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를 지급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문무왕은 똑같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북거(北渠), 구기(仇杞) 등에게는 쌀인 조(租)가 아니라 조(粟) 1,000섬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북거, 구기 등이 외위(外位)인 술간(述干)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에는 서울인 경주에 사는 사람을 대상으로 지급하던 경위(京位)와 경주 이외의 지방민에게 지급하였던 외위가 있었다. 따라서 관등이 경위였는지 외위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경주에 사는 사람이었는지 지방에 사는 사람이었는지를 구분할 수 있다. 같은 공적을 세워서 상을 받을 때, 경위인 일길찬을 받은 사람은 조(租)를 받고, 외위인 술간을 받은 사람은 조(粟)을 받았다는 것은 조(粟)보다 벼인 조(租)가 더 귀하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길찬은 7위의 관등이고, 술간은 8위의 관등이기 때문에 한 등급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위와 외위의 차이에 따라 조(租)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조(租)가 신분 또는 관등의 등급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670년(문무왕 10)에 한기부(漢岐部)의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자, 왕이 조(粟) 200섬을 주었다. 다산(多産)을 한 여인을 기려 하사해 줄 때, 향덕과 지은에게 내려준 쌀이 아니라 조를 내려준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다산도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효(孝)를 더욱 강조하고 중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조(粟)가 아니라 쌀을 내려준 것이다.

이처럼 조(租)를 하사해 주는 것은 받은 사람의 관등이나 신분의 차이를 보여 주기도 하고, 받은 사람의 공적이 질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도 판정해 주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조(租)는 아무 때나 내려주는 것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하사품은 조(粟)나 그냥 곡식(穀)이었다. 조, 즉 쌀이 다른 곡물보다 훨씬 귀중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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