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
  • 7. 쌀과 화폐
박찬흥

쌀은 화폐로도 사용하였다. 화폐란 거래를 원활히 하는 데 쓰는 매개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 경제 단계를 거쳐 물물 교환 단계에 이르면 조개껍데기·곡물·베 등을 물품 화폐로 사용한다. 이후 금·은·동 등을 원료로 하는 화폐가 주조되어 유통되다가, 다시 오늘날과 같이 강제적 통용력을 지닌 지폐나 동전을 사용한다. 화폐는 ‘물품 화폐→금속 화폐(칭량 화폐→주조 화폐)→지폐→예금 화폐’의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데, 물론 쌀은 물품 화폐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쳐 화폐가 변화, 발전하였다. 996년(성종 15)에 처음으로 철전(鐵錢)을 주조하였는데, 우리나라 화폐사에서 그 이전은 ‘화폐의 생성기’라고 할 수 있다. 원시 시대부터 10세기까지 우리나라의 화폐 생성기에는 철, 쌀, 베 등의 물품 화폐를 사용하였고, 대외 교역을 통해 중국의 동전이 유입되었다. 그 외에 동옥저와 신라에서 글자나 무늬가 없는 동전, 즉 무문전(無文錢)을 사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58)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5권,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

원시 시대에는 교환 수단이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한시기에 이르러 철을 생산하여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삼한 가운데 변진에서는 “철을 생산하는데, 한(韓)·예(濊)· 왜(倭)가 모두 쫓아 그 철을 취하였다. 여러 시장에서 (물품을) 살 때 모두 철을 사용하여, 마치 중국에서 전(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또 (그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의 2군에 공급하였다.”고59)『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변진. 하였으니, 철을 화폐처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고분 등에서 판상 쇠도끼(板狀鐵斧), 덩이쇠(鐵鋌)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이것들은 철제 도구를 만드는 소재로 사용하였고, 한편으로는 물품의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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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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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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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국 전국시대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포전(布錢)은 물론 한나라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신나라 왕망(王莽) 때의 화폐 등이 한반도의 각 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들 중국 화폐는 1∼5세기에는 출토되지 않고 6세기 무령왕릉에 가서야 오수전이 다시 발견되었고, 이후 당나라의 화폐가 신라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중국 화폐는 한정된 계층과 범위에서 사용된 듯하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폐 유통을 시도할 만큼 큰 영향은 주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쌀·조·보리 등의 곡물류와 베·모시·비단 등의 견직물·마직물이 국가에 대한 조세 납부와 지출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동시에 상업 활동을 할 때 물품 화폐로서 통용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조세로 포(布)와 조(租)를 징수하였으니, 이것은 당시의 상업 유통과 거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쌀이 물품 화폐로 쓰였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태종무열왕 때(654∼661)에 “(경주) 성안에 있는 시장의 물건 값이 베(布)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이 태평성대라고 하였다.”라고60)『삼국유사』 권1, 기이2, 태종춘추공. 기록되어 있다. 시장 물건 값의 기준을 베 한 필의 가격을 기준으로 정하였고, 그 베 한 필의 가격이 조(租) 30석이기도 하고 50석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시장 물가를 백성들이 태평성대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안정되고 낮은 가격이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 수십 년 간 계속 전쟁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이렇게 베의 가격이 낮아진 것은 백제 멸망 후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 즉 태종무열왕 말년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런데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베 한 필의 가격인 30석과 50석의 차이가 20석이나 되는 이유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시장 안에서 같은 품질의 베 가격을 같은 품질의 조 가격으로 매매하는 경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태종무열왕 당대에 50석에서 30석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경주 안의 서로 다른 시장에서 가격이 다른 것일 수도 있고, 조의 품질에 등급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베의 품질이 차이가 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조의 품질이 두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쌀의 품질 등급에 따른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겠지만, 국가에서 조를 수취할 때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두 등급의 조가 시장에 유통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경우, 기준이 되는 베의 품질이나 크기에 차이가 나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베는 그 촘촘함에 따라 15새(升), 20새, 25새, 28새 등의 등급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 말에도 시장에서 쌀로 물건을 샀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61)『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弓裔).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에 쫓겨나던 해인 918년에, 당나라의 왕창근(王昌瑾)이란 상인이 태봉의 도읍 철원의 시전(市廛)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모습이 걸출하게 크고 머리카락이 온통 희며 옛 의관을 입을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왼손에는 옹기 사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자, 왕창근이 곧 쌀(米)을 주고 그 거울과 바꾸었다. 그 거울에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고 신라를 얻는다는 도참 예언(圖讖豫言)이 쓰여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시전에 머물고 있는 상인인 왕창근이 거울을 살 때 쌀로 샀음을 보여 준다.

『고려사』에는 “당나라 숙종이 아직 즉위하기 전에 천하 산천을 두루 유람하기 위해 현종 천보(天寶)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 서포(西浦)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강바닥에 진흙이 차서 시종(侍從) 관원들이 배 안에 있던 돈을 던져 펴고서야 상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후 그곳을 전포(錢浦)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2)『고려사』 권1, 서문(序文), 고려세계(高麗世系). 숙종이 신라에 왔었다는 내용은 왕건의 조상 계보를 당나라 황실과 연결하여 고려 왕실의 세계(世系)를 높여 보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왕건 집안이 대대로 송악(松嶽) 지역의 해상 세력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와 무역을 할 때 진흙을 덮을 만큼 많은 동전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였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화폐가 신라에서 어느 정도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봉의 도읍인 철원의 시장에서 당나라 상인인 왕창근이 중국 화폐가 아니라 쌀로 거울을 샀다는 사실은 쌀이 여전히 물품 화폐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나라의 화폐는 대외 무역을 하는 항구 등을 중심으로 사용되었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쌀 이 화폐의 기능을 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63)원유한, 『한국 화폐사』, 한국은행 발권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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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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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화폐로 사용하는 것은 저잣거리의 상인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구매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북 경주 외동면 토함산 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었다. 숭복사에는 896년(진성여왕 10)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숭복사비가 서 있었는데, 지금은 비문의 조각만 일부 남아 있다. 비문은 조선시대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비문의 원문은 조선시대에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편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에 남아 전하고 있다.

숭복사비문에 따르면,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 어머니의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 왕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였다고 한다. 뒷날 798년 원성왕이 죽고 왕릉을 이 곡사에 만들게 되었고, 곡사는 토함산 기슭의 현재 숭복사 터로 옮겼다.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고, 896년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다.

원성왕릉을 곡사가 있던 자리에 만들 때의 상황이 숭복사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왕릉을 만드는 곳이 비록 왕토(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공전(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하여 구롱지(丘壟地) 100여 결(結)을 사서 보태었는데, 값으로 치른 벼(稻穀)가 모두 2,000점(苫: 유(斞)에서 한 말을 뺀 것이 점(苫)이고 열여섯 말이 유이다)이었습니다.” 신라 안의 모든 토지는 다 왕의 것이지만, 공전이 아니므로 따로 땅값을 지불하였다는 것이고, 부근의 땅을 묶어 사들일 때 그 값을 벼(稻穀)로 지불하였다. 껍질을 깐 쌀(米)이 아니라 벼 상태로 지불한 것이지만, 신라 왕실에서도 벼를 현물 화폐로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땅 100여 결의 가격이 좋은 값으로 벼 2,000점, 즉 3만 말(斗)이었음을 알 수 있다.

쌀을 교환물, 즉 ‘화폐’로 사용하는 것은 쌀이 신과 인간 사이에 교환되는 선물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경우에도, 물물 교환의 전통이 뿌리 깊고 쌀을 ‘화폐’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동전이 전래된 후에도 화폐 경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일본 중앙 정부에서는 화폐 경제를 보급시키려고 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쌀이나 베 등을 사용한 물물 교환이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화폐 경제가 실제로 정착한 것은 12세기부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 수단으로서 화폐보다는 쌀을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쌀에 대한 상징성, 신성한 관념 때문이다. 서구 학계의 화폐론 연구에 따르면, 화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것으로 화폐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 저주스러운 것으로 파악하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만데빌, 아담 스미스 등의 견해로 화폐는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수단이라고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화폐에 대한 관념은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화폐와 쌀은 모두 교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화폐는 ‘오염된’ 것으로도 ‘깨끗한’ 것으로도 되는 데에 비해, 쌀은 항상 ‘성스러운’ 교환물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깨끗한’ 물건임에는 변함이 없다. 화폐와 쌀의 결정적인 차이는 화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쌀의 의미 및 가치는 한 가지라는 점이다. 화폐가 깨끗한 선물인 동시에 마성(魔性)을 가진 물신(物神)이 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쌀은 언제나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대상끼리 교환되는 특별한 물건인 것이다. 오염된 쌀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화폐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에서는 ‘부정(不淨)한 돈’과 ‘깨끗한 돈’이 공존해 왔다고 한다. ‘부정한 돈’이란 금속 화폐·화폐를 가리키고 ‘깨끗한 돈’이란 쌀을 말한다. 중국에서도 처음으로 화폐가 전래된 이래 화폐·금속 화폐는 부정, 불결, 타락의 원천이며, ‘인간의 본성과 섞일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고 한다. 12세기 이후 일본에서 쌀은 ‘정(淨)’, 화폐는 ‘부정(不淨)’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교환 수단으로서 화폐보다 쌀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화폐는 ‘깨끗한 돈’도 되고 ‘오염된 돈’도 되지만, 쌀은 옛날의 신성함을 많이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오염된 쌀’은 되지 않는다.64)오누키 에미코, 박동성 옮김, 『쌀의 인류학-일본인의 자기 인식-』, 소화, 2001, 128∼147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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