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1. 쌀 생산의 확대
  • 좁쌀·보리·콩
이정호

이러한 곡물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통 사회에서 재배하거나 식량으로 먹은 비중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보리·좁쌀·콩 등 밭작물이었다. 삼국시대에 좁쌀(粟)은 국가에 바치는 조(租)로 관념될 정도로 대표적인 곡물 가운데 하나였다. 707년(성덕왕 6)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에게 좁쌀을 나누어 준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신라 사람들은 보리를 먹는다는 중국 측 기록도 있다.66)『태평어람(太平御覽)』 권838, 백곡부(百穀部)2, 맥(麥). 자연재해로 인한 보리의 피해 기사를 다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나, 그해 농사의 풍년을 보리농사에 비유하고 있는 사실 등도 당시에 보리가 널리 재배되었던 사정을 반영한다. 이로써 보면 삼국시대의 주식은 쌀이라기보다는 좁쌀, 보리 등 밭작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밭작물이 생산 비중에서나 일반 백성의 주식으로 중요하였다는 점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053년(문종 7) 조세로 거두어 좌창(左倉)에 수납된 곡물로, 쌀·보리·좁쌀 등이 14여만 석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67)『고려사』 권80, 식화지(食貨志)3, 녹봉(祿俸), 서문(序文). 이것은 보리와 좁쌀이 쌀과 함께 중요한 조세 품목이었고, 그만큼 다수 재배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여러 신하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궁예가 도주하여 깊은 계속에 숨어 지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려 보리 이삭을 훔쳐 먹었다.68)『고려사』 권1, 태조. 또 1031년(현종 22)에 기록된 ‘정도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를 살펴보면, 탑을 조성하는 과정에 협력 물품으로 보리를 기진(寄進)한 내용이 나온다.69)허흥식, 『한국의 고문서』, 민음사, 1988, 262쪽,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이러한 사실은 당시에 보리가 많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좁쌀 또한 널리 재배하였다. 이것은 우선 당시 기록에 좁쌀을 의미하는 글자인 속(粟) 자를 일반 곡물의 의미로 쓰기도 한 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경지의 다수가 밭이었다는 점과 조는 작물 특성상 습한 것을 싫어하는 속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도, 밭에서 가을철에 수확하는 대표 적인 곡물로는 벼 못지않게 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었던 것도 좁쌀 재배의 비중이 컸던 사정을 뒷받침해 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황량(黃梁: 누른 조)과 한속(寒粟: 차조)이 있었다고 한다.70)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23, 잡속(雜俗)2, 종예(種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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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사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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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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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따르면 고려에 흑두(黑豆: 검은콩)·연두(燕豆: 녹두콩)·비두(豍豆: 완두콩)가 있었다고 전하며,71)한치윤(韓致奫),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6, 물산지(物産志)1, 곡류(穀類), 두(豆). 1417년(태종 17)에 간행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약재로 변두(藊豆)·적소두(赤小豆)·녹두(菉豆) 등을 소개하고 있다.72)이덕봉, 「향약구급방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 연구」, 『아세아 연구』 6-1,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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