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1. 쌀 생산의 확대
  • 쌀의 이름과 종류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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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와 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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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쌀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올벼(早稻)와 늦벼(晩稻)의 구분이 있었다. 도정 정도에 따라 조미(糙米)·갱미(粳米)·백미(白米) 등으로 달리 불렀다. 조미는 왕겨만 벗긴 쌀, 즉 현미(玄米)이며, 갱미는 바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쌀이다. 조세로 쌀을 낼 때는 대개 갱미, 즉 도정이 된 상태로 납부하였다. 관료들에게 녹봉을 지급할 때에도 도정된 갱미 형태로 지급하였다.82)『고려사』 권80, 식화지3, 녹봉, 충렬왕 6년 10월. 경우에 따라 지급할 쌀이 부족하면 좁쌀을 대신 지급해 준 적 도 있었는데, 이때 좁쌀과 갱미는 4 대 3의 비율로 환산하여 지급하였다.83)『고려사』 권80, 식화지3, 녹봉,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 명종 10년 7월.

벼를 도정하는 부담은 조세를 납부하는 일반 농민들이 졌다. 도정의 부담 역시 무시하지 못할 부분이어서, 나라에서는 권세가(權勢家)들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도정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84)『고려사』 권15, 인종 5년 3월 무오.

그래서인지 고려 말에는 도정 부담이 덜한 조미 형태로 납부하도록 변경되었다. 과전법(科田法)에 따르면 논은 1결당 조미 30두, 밭은 1결당 잡곡 30두를 납부하도록 규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갱미 형태로 조세미(租稅米)를 납부하다가 과전법 실시 이후에 조미 형태로 변화되었던 셈이다.

품종에 따른 구분도 있어 점성도(占城稻)·선명도(蟬鳴稻)·경조(京租) 등은 당시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인 벼 품종의 명칭이다. 점성도는 중국 강남 지역에서 들여온 새로운 볍씨 종자인데, 적응력이 뛰어나 한발과 저습 등 열악한 환경에도 잘 자라는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선명도는 한자를 풀이하면 매미가 울기 시작할 때 수확하는 볍씨란 뜻으로, 일찍 파종하고 일찍 수확하는 올벼였다. 경조는 일제강점기까지도 평안도·황해도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건답법(乾畓法: 마른 땅에 파종하고 밭작물처럼 재배하다가 비가 올 때 물을 가두어 일반 벼와 같이 재배하는 방법)에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볍씨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재배해 온 늦벼 품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쌀은 용도에 따라서도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조세로 납부하여 관료의 녹봉에 충당되는 쌀을 녹전미(祿轉米)라 하였다. 잡미(雜米)·무단미(無端米)·품미(品米)라는 이름은 고려 후기 재정 부족으로 추가로 쌀을 징수하게 되면서 생겨난 명칭들이었다.

잡미란 상인들이 시장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잡된 쌀을 일컫던 말이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명종 때 잡미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85)『고려사』 권85, 형법지(刑法志), 금령(禁令).

무단은 방언으로 무방(無妨)이라고도 하는데, ‘이유가 없는 일’이란 뜻 이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홍건적(紅巾族)의 침입 등으로 국가 재정이 부족해지자 백성들로부터 추가로 쌀과 콩을 거두었는데, 대호(大戶)는 쌀과 콩 각각 1석, 중호(中戶)는 10두, 소호(小戶)는 5두씩을 거뒀다. 종전에 비해 고율의 부담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무척 고통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이유 없이 강제로 거둔 것이라 하여 ‘무단’을 붙여 무단미라고 불렀다.86)『고려사』 권79, 식화지2, 과렴(科斂), 공민왕 21년 9월

1376년(우왕 2)과 1383년(우왕 9)에도 군량이 부족하여 관료들로부터 관품(官品)에 따라 쌀을 거뒀는데, 이를 품미라고 불렀다.87)『고려사』 권79, 식화지2, 과렴, 우왕 2년 9월 ; 『고려사』 권82, 병지2, 둔전(屯田), 우왕 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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