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2. 쌀 증산 정책
  • 고려시대 조세 제도의 특징
이정호

예나 지금이나 조세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 운영에 매우 중요하다. 또 조세 제도는 각 사회의 역사, 문화, 경제 상황 등을 반영한 역사적 산물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는 조세로 납부되는 물품이 다르다. 각 사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조세 제도의 내용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조세 물품이 돈(화폐)인 데 반해 전통 사회에서는 곡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 사회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농산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산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 중세 사회에서 조세 제도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당시의 토지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중세 사회에서 각 개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소유권(所有權)’을 가지고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물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반은 물론 일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민전(民田)이 대표적이다. 민전 소유자는 매매·증여·상속 등의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으며, 국가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권리를 보호해 주었다. 한편 국가 는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라고 하는 ‘왕토 사상(王土思想)’을 이념적 바탕으로 민전에서 생산되는 수확물의 일부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였다. ‘수조권(收租權)’이라 부르는 권리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수조권에 입각하여 국가가 사유지, 특히 민전 소유자로부터 수확물 가운데 일부를 거두었던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중세의 토지 제도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국가에서는 관료처럼 국가 업무에 봉사하는 개인이나 관청 등에 수조권을 위임하여 운영하였다는 점이다. 전시과(田柴科) 제도를 통해 토지를 받은 관료가 수조권을 행사하여 민전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수조권을 통해 조세를 거둔 개인은 다시 일정량을 국가에 납부하여야 했다.

결국 민전을 소유한 일반 농민은 국가나 국가가 지정하는 개인(대표적으로 관료)에게 수확물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바쳤고, 개인 수조권자는 자신이 받은 몫의 일부를 다시 국가에 납부하였다. 원래 ‘조세(租稅)’란 말은 ‘조(租)’와 ‘세(稅)’의 합성어로서, 전자를 ‘조’, 후자를 ‘세’라고 불렀다.

고려 말 과전법 규정에 “모든 공전과 사전의 조(租)는 논 1결에 조미 30두, 밭 1결에 잡곡 30두를 거둔다.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공해전(公廨田)·공신전(功臣田) 외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논 1결에 백미 2두를 세(稅)로 내고 밭 1결에 황두 2두를 세로 낸다.”라고 하여,93)『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 공양왕 3년 5월. 조와 세를 구분해 정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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