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2. 쌀 증산 정책
  • 조운과 조창
이정호

쌀을 비롯해 각지에서 생산된 곡물은 육로 혹은 수로·해로를 통해 수도 개경(開京: 개성)의 창고로 운반되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는 육로로 지게나 달구지 등을 이용해 옮겼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운반량이 최대 15∼20섬으로 제한되는 단점이 있었다. 원거리 수송에도 이용하기 힘들었다. 대량의 쌀을 원거리로 운반할 때는 대체로 수로·해로를 이용하여 배로 옮겼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는 배로 수송하기 위해 조세를 집결해 두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를 선박에 실어 개경으로 운반하는 것을 조운(漕運)이라 하는데, 그 일을 담당한 기관이 바로 조창이었다.96)고려시대 조운과 조창에 대해서는 최완기, 「고려조의 세곡 운송」, 『한국사연구』 34, 한국사연구회, 1981 참조.

한편 조창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포(浦)를 통해 조세미를 수집·운반하였다. 포를 통한 조운은 당시의 사정상 각 지방의 유력자인 호족(豪族)의 협력을 받아 이루어졌다. 고려 초기에 각 지방은 호족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호족들이 중앙 정부에 납부할 조세를 거두어 포에 모아 두었다가 선박을 이용해 개경으로 운송하였다. 포는 한강 연안과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연안 등에 60개가 있었다. 조세를 운반하는 데는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이를 수경가(輸京價)라고 한다. 당시에 수경가 역시 호족들이 자의적으로 책정하였고, 조세를 납부하는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국가가 조운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조창을 설치하여 국가가 조운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992년(성종 11)에 국가에서 명령을 내려 포의 이름을 개정하고, 수경가를 제정하였다.97)『고려사』 권3, 성종 11년 11월 계사. 이것은 종래 호족의 협력하에 조운이 이루어지던 상황을 벗어나 국가가 조운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정한 수경가는 운반 거리 등에 따라 10단계로 구분하여, 최고 5석당 1석∼최저 21석당 1석으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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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13조창
고려의 13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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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각종 제도와 관청 등이 완비되기 시작한 성종대(981∼997)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적어도 정종대(946∼949)에는 12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12개의 조창은 통조포(通潮浦: 경남 사천의 해변)에 있던 통양창(通陽倉), 나포(螺浦: 경남 마산의 진해만 연안)에 있던 석두창(石頭倉), 조양포(潮陽浦: 전남 순천의 순천만 연안)에 있던 해룡창(海龍倉), 조동포(潮東浦: 전남 영암의 해변)에 있던 장흥창(長興倉), 통진포(通津浦: 전남 나주의 영산강 하구)에 있던 해릉창(海陵倉), 부용포(芙蓉浦: 전남 영광의 해변)에 있던 부용창(芙蓉倉), 조종포(朝宗浦: 전북 옥구의 금강 하구)에 있던 진성창(鎭城倉), 제안포(濟安浦: 전북 부안의 줄포만 연안)에 있던 안흥창(安興倉), 성연부곡(聖淵部曲: 충남 서산의 남양만 연안)에 있던 영풍창(永豊倉), 편섭포(便涉浦: 충남 아산의 아산만 연안)에 있던 하양창(河陽倉), 여수포(麗水浦: 충북 중원의 남한강 연안)에 있던 덕흥창(德興倉), 은섬포(銀蟾浦: 강원 원성의 남한강 연안)에 있던 흥원창(興元倉)이었다. 그 뒤 문종대에 해위포(海葦浦: 황해 장연의 대동만 연안)에 있던 안란창(安瀾倉)이 추가되어 고려의 조창은 모두 13개가 설치되었다.98)최완기, 앞의 글, 35쪽 및 47쪽.

조창에는 판관(判官)이라는 관리를 배치하여 운송 업무를 감독하였고, 색전(色典)이라는 향리(鄕吏)가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 초공(梢工)·수수(水手)·잡인(雜人)이라 불리는 뱃사람과 잡일꾼이 있어, 조운선(漕運船)에 곡물을 싣고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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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선
조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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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조창에는 일정한 수의 조운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해로로 운반할 경우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을 이용하였고, 수로로 운반할 경우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밑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을 이용하였다. 조창에 보관해 둔 쌀은 이듬해 2월부터 조운을 시작해, 개경과 가까운 곳은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 운송을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쌀을 조운하다 보면 운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부족분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옮기다 실수로 땅바닥이나 강물에 흘리든, 썩어 못쓰게 되든, 쥐가 갉아먹든, 처음 출발할 때에 비해 정작 개경에 도착한 양은 줄어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일정량을 더 거두어 손실분을 보충하였는데, 이것을 모미(耗米)라고 하였다. 모미는 처음에 1석 운반하는데 1승씩, 곧 운반량의 150분의 1을 거뒀다. 그러다가 1053년(문종 7)에 갑자기 비율을 높여 1곡에 7승, 곧 운반량의 22분의 1로 높여 책정하게 되면서, 백성들에게 주는 부담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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