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2. 쌀 증산 정책
  • 수리 시설
이정호

볍씨 종자 가운데는 밭작물처럼 재배하는 밭벼(陸稻)와 같은 것도 있지만, 대다수는 물을 가두어 놓은 논에서 재배한다. 쌀농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벼가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물을 적절한 시기에 공급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농작물에 물을 공급하는 수리 시설의 확충은, 곧 벼 재배 기술의 발전 및 쌀 생산의 증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만든 수리 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형태는 제언(堤堰)이었다. 제언은 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모아 저수하거나 평지를 파서 물을 저수하는 수리 시설이었다. 제언은 고대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조성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벽골제(碧骨堤), 청제(菁堤) 등이다. 규모 또한 커서 790년(원성왕 6)에 벽골제를 증축할 때 전주(全州) 등 일곱 개 주로부터 인부가 동원될 정도였다.101)『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6년 정월. 고려시대에 들어와 현종대(1010∼1031)에 벽골제를 보수한 사례와 문종대(1046∼1083)에 남대지(南大池)를 보수한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102)『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황해도,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산천(山川)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3, 전라도, 김제군(金堤郡), 고적(古跡). 이러한 제언은 고려 때 새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이전 시기에 조성된 것을 보수한 경우였다. 현재 고려 전기 제언의 사례로는 그나마 이와 같은 두 가지 사례만 겨우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니, 그만큼 농업용수의 공급에 어려움이 있었던 사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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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벽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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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의 보수와 신축은 12세기경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최정분(崔正份)이 수축한 상주(尙州)의 공검지(恭檢池), 김방경(金方慶)이 축조한 밀양(密陽)의 수산제(守山堤)처럼 지방관 주도로 제언이 조성되었다. 1188년(명종 18)에는 중앙 정부에서 전국에 명령을 내려 제언을 수축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103)『고려사』 권79, 식화지2, 농상(農桑), 명종 18년 3월.

수리 시설의 조성이 활발해지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도 몇 가지 나타났다. 우선 이전과 달리 소규모 제언을 많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선 시기의 제언들이 국가 주도로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건설된 대규모 수리 시설이었다는 점과 차이가 난다. 군현 단위에서 독자적으로 수축할 수 있는 소규모 시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그동안 군현 단위로 제언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일반민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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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강화도의 간척지
고려 후기 강화도의 간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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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로운 변화로 많이 주목해 왔던 것은 연해안 저습지(低濕池)와 간척지(干拓地)를 개발하기 위한 수리 시설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하거(河渠)·방천제(防川堤)·방조제(防潮堤) 등을 조성하여, 연해안 저습지와 간척지를 새로이 농경지로 바꾸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설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토목 기술의 발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비록 최종 완성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수로 개착(開鑿)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는 점을 통해 하천, 해수의 유입을 방지하는 구조물의 건설에 이르는 기술의 진보를 예상하기도 한다.

어쨌든 저습지, 연해안의 농경지화는 농업 생산 활동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경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변화였다. 이 시기에 저습지가 개발되어 가는 모습은 양주(梁州: 경남 양산)의 경우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원래 양주의 토지는 낙동강 하류 지역에 위치하여 가물면 곡식이 익지만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습 지대였다. 이곳 에 수령으로 부임하게 된 이원윤(李元尹)은 주민을 동원하여 도랑을 깊이 파는 배수에 노력을 기울여 다음해 수확에서 톡톡한 효과를 거두었다.104)최해(崔瀣), 『졸고천백(拙藁千百)』 권1, 「송안양주서(送安梁州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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