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2. 쌀 증산 정책
  • 벼 재배 기술의 발달
이정호

수리 시설의 확충과 함께 벼 재배 기술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고려 전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벼를 재배할 때 사용한 방법은 수경 직파법(水耕直播法)과 건경 직파법(乾耕直播法)이었다. 수경 직파법이란 볍씨를 싹틔워 논에 파종한 후 물을 대는 방법을 말하고, 건경 직파법이란 마른땅에 파종하고 밭작물처럼 재배하다가 비가 올 때 물을 가두어 일반 논에서처럼 재배하는 방법을 말한다. 특히, 건경 직파법은 파종할 때 봄 가뭄이 심한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에서 나온 독특한 농법이었다. 수리 시설이 그다지 구비되어 있지 못한 당시로서는 널리 행해진 벼 재배 방법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점차 수리 시설이 마련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물의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수경 직파법이 확대되어 나갔다. 더 나아가 고려 말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벼농사를 짓는 경우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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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앙법
이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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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앙법은 못자리에서 볍씨의 싹을 틔워 논에 옮겨 심는 벼농사 방법이다. 이 방법은 보통 수확할 때까지 잡초를 제거하는 데 대여섯 번 작업이 필요한 반면에 두세 번이면 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또 종자를 절약할 수 있고, 수확량도 많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수리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경우, 예를 들어 봄 가뭄이라도 만나 물 공급이 중단되면 못자리에 심어 놓은 묘(苗)가 모두 말라죽어 한 해 농사를 전부 망칠 수 있는 위험 부담이 따르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경우에도 국가에서 농사를 망칠 것을 우려해 이앙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던 것이다.105)『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6월 임자 ; 『세종실록』 권68, 세종 17년 4월 정사.

그런데 고려 후기 관료인 백문보(白文寶, 1303∼1374)가 왕에게 우리나라의 농사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하고 있었다.

강(江)·회(淮)의 사람들(중국 양쯔강(揚子江)·화이수이강(淮水) 지역, 즉 강남 지역 사람을 일컬음)이 농사를 지으면서 홍수와 가뭄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수차(水車)의 힘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을 댈 때 도랑(溝澮)에서만 물을 끌어들일 뿐이고, 수차로 쉽게 물을 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논 아래에 개천(渠)이 있고 그리 깊지 않은데도 아래로 내려다볼 뿐 감히 퍼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버려진 땅이 10에 8∼9나 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지방관에게 명하여 수차를 만들게 해야 하고 만드는 방법을 본받고 배우게 하면 민간에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뭄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또 백성들이 하종(下種)과 삽앙(揷秧)을 겸하여 힘쓰게 한다면, 역시 가뭄에 대비하고 곡식 종자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106)『고려사』 권79, 식화지2, 농상(農桑), 공민왕 11년.

백문보는 중국 강남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가뭄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로 수차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고려에서도 이러한 수차를 도입하여 보급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 가뭄에 대비하고 종자의 낭비를 줄이는 방법으로 하종, 즉 직파법과 삽앙, 즉 이앙법을 겸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나라 농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수리 시설의 개선이 필요함과 더불어 이앙법의 보급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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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에 쓰던 수차
20세기 초반에 쓰던 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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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 수차
1970년대 초반 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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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건의가 곧바로 실현되어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수차의 보급은 이후 조선 초기에도 시도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당시 기록에 “들녘에서 이앙가(移秧歌)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시구가 남아 있다.107)『동문선(東文選)』 권16, 칠언율시(七言律詩), 「성주청운루상우제(星州靑雲樓上偶題)」, 박효수(朴孝修). 또 “비가 오지 않아 농가에서 이앙을 못해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108)『동문선』 권4, 오언고시(五言古詩), 「삼월이십삼일우(三月二十三日雨)」, 최해(崔瀣). 이러한 사실을 통해 살펴볼 때, 이앙법이 비록 벼농사의 주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고려 후기 일부 지역에서 이미 보급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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