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3. 고려 사회에서 쌀의 역할
  • 쌀값의 변화
이정호

이처럼 소중한 쌀이었기에 쌀값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등락(騰落)을 거듭하였다. 특히 농사 작황(作況)에 크게 영향을 받아 오르내렸다.

거듭된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고 대기근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연재해의 영향은 막대하여 이로 인한 흉년은 다음해 농업 재생산 기반을 파괴하여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심하면 굶주린 사람들이 참다못해 서로 잡아먹는 끔직한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럴 경우 쌀값이 급등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1132년(인종 10) 경성(京城)에 기근이 들어 거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이어졌다. 이때 쌀값이 하늘을 찌를 듯 오르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먹을 것, 곧 쌀이었다. 은병, 말, 옷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보통 때라면 은병 한 개는 쌀 15∼20석의 값어치가 있었지만,112)『고려사』 권79, 식화지2, 화폐, 시고(市估), 충렬왕 8년 6월 ; 『고려사』 권79, 식화지2, 화폐, 시고, 충렬왕 9년 7월. 이때는 한 개가 쌀 5석으로 떨어졌다. 쌀값이 그만큼 폭등한 것이다. 작은 말 한 마리를 쌀 1석에, 얼룩소 한 마리를 쌀 4두면 구입할 수 있었다.113)『고려사』 권16, 인종 10년 7월 경오

경우에 따라서는 농사의 작황을 떠나 다른 요인 때문에 쌀값이 오르내렸다.

충렬왕 3년(1277) 2월에 방(榜)을 내붙여, 왕족·관료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쌀과 콩을 차등 있게 내도록 하여, 홍다구(洪茶丘)가 인솔하는 군대와 말들의 식량, 사료로 충당하게 하였다. 당시 은폐(銀弊) 한 근이 쌀 50여 석에 해당하였는데, 방을 내붙인 지 사흘 만에 쌀 40여 석으로 내렸다. 홍다구가 그 방을 다시 거두어들이니 시장 가격이 다시 비싸졌다.114)『고려사』 권79, 식화지2, 화폐, 시고.

원 간섭기 때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의 군량과 말 사료 때문에 쌀값이 변동된 사례이다. 원래 은폐 한 근에 쌀 50여 석 하던 것이, 군량미로 쌀을 차출하게 되면서 쌀값이 떨어졌다. 불과 사흘 만에 쌀 차출 계획을 철회하자 금세 쌀값이 비싸졌던 것이다.

반대로 쌀값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풍년이 들어 수확량이 늘어나면 쌀값이 내렸고, 또 다음과 같이 특수한 경우도 있었다. 1359년(공민왕 8)에 홍건적이 침입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피난 갈 궁리를 하면서 앞을 다투어 곡식으로 베와 같이 피난 갈 때 가져가기 쉬운 가벼운 물품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평상시 포 한 필에 쌀 2두 하던 것이 5∼6두로 치솟아 베 값이 2.5∼3배나 올랐다.115)『고려사』 권39, 공민왕 8년 12월 기묘. 사람들은 홍건적이 곧 물러나 다시 경성에 되돌아올 것을 예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2년 뒤 홍건적이 또다시 침입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쌀값이 치솟아 베 한 필에 쌀 4두였다.116)『고려사』 권79, 식화지2, 화폐, 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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