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곡물이나 식량이라는 의미를 넘어, 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지위와 관련되어 있었다. 쌀을 누가, 얼마나,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더 나아가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좌우하였다.
쌀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계층은 당연히 당시의 지배층, 즉 왕족과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녹봉으로 쌀을 지급받았다. 녹봉은 왕족으로서 명예상의 우대를 위해서, 혹은 관료의 관직 복무에 대한 대가로 지급됨으로써 이들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관료 가운데는 특별한 경우 개인 소유로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할 정도로 많은 쌀을 가진 자도 있었다. 예를 들어 무신 정권기 최고 권력자였던 최의(崔竩, ?∼1258)는 자기 소유 창고에서 무려 1만 5000석을 내어 관료에게 줄 녹봉의 일부를 충당한 적도 있었다.124)『고려사』 권80, 식화지3, 녹봉, 제아문공장별사, 고종 46년 정월.
가뭄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관료에게 쌀을 내도록 하여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는 비용을 삼기도 하였다.125)『고려사』 권16, 인종 8년 4월 신축. 양반층에도 역역(力役) 동원 명 목으로 호(戶)마다 쌀과 좁쌀을 거두기도 하였다.126)『고려사』 권21, 희종 4년 7월 정미. 이러한 조처 역시 관료야말로 쌀을 소유한 대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항목 | 최고액 | 지급 대상자 |
비주록(妃主祿) | 300석 | 왕비(王妃) |
종실록(宗室祿) | 600석 | 국공(國公) |
문무반록(文武班祿) | 400석 |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령(中書令) |
권무관록(權務官祿) | 60석 | 오부사(五部使) 등 4 |
동궁관록(東宮官祿) | 46석 10두 | 첨사부승(詹事府丞) |
치사관록(致仕官祿) | 300석 | 문하시중, 중서령 |
외관록(外官祿) | 200석 | 서경유수(西京留守) |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소유한 쌀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수단으로 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 후기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처럼 국가에서 백성에게 쌀 등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경우도 있다. 국가에서 재정 궁핍을 보충하는 방법의 하나로 백성에게 곡식이나 은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 1348년(충목왕 4)의 규정에 따르면 벼슬 없던 사람이 쌀 5석을 내면 관직 가운데 가장 낮은 종9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9품은 10석, 종8품은 15석, ……, 정7품은 30석처럼, 높은 관직일수록 더 많은 쌀을 내면 구입할 수 있었다. 이미 벼슬에 있는 사람도 쌀 10석을 내면 1등급을 올려 주었다.127)『고려사』 권80, 식화지3, 납속보관지제(納粟補官制), 충렬왕 원년 12월·충목왕 4년 2월. 1376년(우왕 2)에도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쌀과 콩을 받고 관직을 주었다.128)『고려사』 권80, 식화지3, 납속보관지제, 우왕 2년 12월. 쌀은 곧 경제력을 의미하였고, 쌀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지위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