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4. 쌀과 정치
  • 쌀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
이정호

이처럼 쌀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좀 더 많은 쌀을 가지기 위한 부정행위 또한 난무하였다.

우선 쌀을 유통할 때 모래, 흙 등 이물질(異物質)을 섞어 파는 일이 있었다.129)『고려사』 권12, 예종 즉위년 11월 갑진. 묵은 쌀을 빈민에게 대여하였다가 강제로 이식(利殖)을 챙기는 일도 있었다.130)『고려사』 권15, 인종 5년 3월 무오. 보미(寶米)를 대여하였다가 이식과 함께 되돌려 받는 일이 수익성이 있어 성행하면서, 이에 고통을 받는 백성도 생겨났다.131)『고려사』 권18, 의종 22년 3월 무자. 쌀을 보관하는 창고의 관리 부정으로 쌀이 유출되어 처벌받는 경우도 많았다.132)『고려사』 권21, 신종 4년 7월 갑술.

한번은 쌀가루를 가지고 조작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킨 사건도 있었다. 1313년(충선왕 복위 5)의 일이다. 효가(曉可)라는 중이 미리 꿀물과 쌀가루를 혼합하여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은 감로(甘露), 사리(舍利)라는 것으로 모두 나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인 줄을 모르고 심지어 그 물을 마시거나 혹은 저장하여 두는 사람까지 있었다. 결국 나라에서 효가의 사기 행동을 알아채고 사로잡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133)『고려사』 권34, 충선왕 6년 2월 갑술.

최씨 무신 정권기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우(崔瑀, ?∼1249)에게 만종(萬宗)과 만전(萬全: 崔沆)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말썽을 피우자 최우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게 하였다. 그러자 반성은커녕 50여만 석의 쌀로 고리대를 하면서 재물을 모았다. 이러한 고리대를 보(寶)라는 이름으로 설치 운영하였다. 보는 원래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기금이었다. 보를 운영하는 방식은 존본취식(存本取食), 즉 본전을 토대로 대부해 주었다 이자와 함께 갚게 하면서 이자만 가지고 특정 용도에 사용하는 기금이었다. 예를 들어 학보(學寶)는 공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부모기일보(父母忌日寶)는 부모의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보였 다. 만종과 만전은 이것을 악용해 사찰의 쌀을 대부해 주었다가 만약 갚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받아 냈던 것이다. 때문에 농민들이 국가에 조세조차 납부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려운 시절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는 사건 하나가 있었다. 우왕대(1374∼1388)의 일인데, 당시는 여러 가지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한 시절이었다. 토지 탈점(奪占)으로 대표되는 경제 혼란은 물론 왜구(倭寇)의 침략,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기근이 들곤 하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이금(伊金)이란 자가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나는 능히 석가불(釋迦佛)을 모시고 올 수 있다. 무릇 귀신들에 기도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 말·소의 고기를 먹는 자, 돈과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거든 3월에 가서 보라!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한 번 작용(作用)하면 풀에서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서는 알곡 열매가 맺힐 것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곡물을 한 번 심어서 두 번 수확을 할 것이다.

내가 명령을 내려 산천의 귀신들을 파견하게 된다면 왜적은 다 붙잡을 수 있다.134)『고려사』 권107, 열전(列傳)20, 권단(權㫜) 부(附) 권화(權和).

이금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백성들에게 재화를 나누어 주고, 더욱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며, 왜구까지도 격퇴해 준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쌀, 비단, 금, 은을 바쳤다. 이 사건은 결국 이금이 백성들을 현혹시킨 죄목으로 잡혀 처형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백성들의 염원이 무엇이었 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곤궁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라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권세가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국외에서는 왜구의 피해를 방지하여야 했다. 조금 더 바란다면 이금이 약속한 것처럼 나무에서도 곡식이 맺히고 한 번 심어 두 번 수확해서,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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