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4. 쌀과 정치
  • 원 간섭기의 쌀 문제
이정호

이처럼 쌀은 그 사람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때로는 부정행위처럼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쌀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쌀은 고려와 다른 나라의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쌀을 매개로 한 국제 교역이 이루어진 것은 대표적 사례였다. 여진인은 고려의 의주, 정주 등 북쪽 국경 지역의 도시에 찾아와 고려의 쌀을 구입해 갔다. 은(銀) 1정(錠)에 쌀 4∼5석을 구입해 갔다.135)『고려사』 권22, 고종 3년 윤7월 병술. 대마도 만호(對馬島萬戶) 숭종경(崇宗慶) 역시 교역을 위해 사신을 파견해 조회해 오자 쌀 1,000석을 하사해 주기도 하였다.136)『고려사』 권41, 공민왕 17년 11월 병오.

쌀을 둘러싼 국제 관계의 모습을 원 간섭기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좀 더 살펴보자. 원 간섭기에 원나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려의 물자를 징발해 갔는데, 대표적인 물품 가운데 하나가 쌀이었다.

몽고와 전쟁을 하던 시기는 물론 강화를 한 이후에도 고려에 대해 요구하는 사항이 이어졌다. 몽고가 복속국(服屬國)에 요구한 ‘육사(六事)’가 그것이었다. ‘육사’란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 자제의 입질(入質), 호구(戶口) 상황의 보고, 역참(驛站)의 설치, 군사 지원, 군량 보조, 조세의 수송,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설치 등이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작은 부담이 없었지만, 특히 커다란 고통을 준 것은 몽고 군대의 군량 조달 문제였다. 원나라는 이를 위해 고려에게 쌀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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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중 몽고군 전투
『몽고습래회사』 중 몽고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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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대는 전쟁의 와중에 고려에 대규모로 주둔하였던 것은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 원정을 구실로 진주(進駐)하였다. 이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 원나라는 고려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는 둔전 지역에 배치한 병력의 생계를 위해 쌀을 징발하였다.

몽고와의 전쟁 직후인 1270년(원종 11) 2월에는 서경에 주둔한 몽고 군대의 군량으로 쌀 1000석, 잡곡 500석, 소금 100석을 지급하였다.137)『고려사』 권26, 원종 11년 2월 갑신. 이어 5월에 몽고는 고려 조정에 대해 출륙환도(出陸還都)할 것을 강요하는 한편 군량 등에 소요될 쌀 1만 석을 요구하였다.138)『고려사』 권26, 원종 11년 5월 경술. 전쟁으로 인한 피해만도 컸던 데다 이러한 몽고의 요구는 고려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윤11월에는 관료에게 쌀을 내어 군량 마련을 돕도록 하였다.139)『고려사』 권82, 병지2, 둔전, 원종 11년 윤11월.

특히, 그 후 고려-몽고 연합 부대의 일본 원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려 측의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에 거듭 군량의 공급을 독촉하고140)『고려사』 권27, 원종 12년 3월 계사. 둔전에 필요한 농우(農牛)와 종자를 요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가 지게 된 부담은 엄청나게 컸다.

군량 - 10만 9199석 6두

말과 소의 사료 - 43만 2005석 6두

왕경(개성)의 외국 사신 접대처에서 사신 접대 - 1만 7151석

종자 - 1만 5000석

이는 1270년(원종 11)부터 이듬해 4월까지 고려가 원나라에 공급한 물자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고려의 국가 재정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은 당연하였다. 심지어 내장택(內莊宅)의 쌀이 고갈되어 왕이 식사를 거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141)『고려사』 권27, 원종 14년 2월 경자. 이때 관료에게 녹봉 지급을 금지하려는 시도를 한 것142)『고려사』 권27, 원종 14년 2월 신해.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시중 김방경(金方慶),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글을 보내기를, “우리나라는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과 많은 군사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로 인하여 이미 수년간에 걸쳐 집집마다 징수하였고 게다가 또 왜를 정벌하기 위하여 전함들을 건조하는데 장정들은 모두 그 역사에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늙은이들과 약한 자들만이 남아서 겨우 밭갈이와 씨뿌리기는 일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가뭄이 들고 나중에는 홍수가 나서 곡식이 여물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가의 수요를 빈민들에게서 징수하는데 몇 말 몇 되에 이르기까지 모두 쌀 항아리를 털어서 바쳤으므로 벌써 나무 열매나 풀잎을 먹는 백성들이 있다. 아마도 백성들의 영락(零落)과 피폐(疲斃)가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 하였다.143)『고려사』 권28, 충렬왕 원년 정월 경진.

이 글은 원 간섭기 동안 고려에 쌀이 얼마나 부족하였는지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삼별초(三別抄)의 반란 진압과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량 때문에 쌀을 수년간 집집마다 징수하였다. 게다가 때마침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은 쌀을 구경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 따위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274년(원종 15) 제1차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난 다음에도 재차 정벌을 시도하면서 또다시 고려의 부담은 계속되었다. 1277년(충렬왕 3)에는 일본 정벌에 동원할 배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성도감(造成都監)에서 제왕(諸王)과 재상(宰相)으로부터 각 영(領)의 군 인에 이르기까지 인부를 내게 하여 산에서 재목을 운반하였는데, 하루 일을 빠진 자에게는 쌀 1석을 징수하였다.144)『고려사』 권28, 충렬왕 3년 7월 경인. 정벌군의 말 사료 또한 고려에서 부담하게 되어, 이것 역시 큰 고통이었다. 나라에서는 각도에 관료를 파견해 납부를 독촉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큰 고통을 당하였다. 경상도 전수별감(轉輸別監)이 날짜를 정해 납부를 독촉하자 백성들이 모두 숨어버렸고, 심지어 납부 책임을 진 어떤 향리는 기일 내에 맞출 수 없자 스스로 목메 자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145)『고려사』 권29, 충렬왕 7년 정월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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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중 해전
『몽고습래회사』 중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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