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4. 쌀과 정치
  • 강남미
이정호

고려에 외국 쌀이 들어온 적도 있었다. 특히 원 간섭기에 그러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다. 고려에 들어온 원나라의 강남미(江南米) 10만 석이 그것이다. 고려에 강남미가 들어오게 된 것은 당시 세자 신분이던 충선왕의 노력에 말미암은 결과였다. 세자(충선왕)가 고려의 기근 사정을 전 쟁으로 농사짓지 못한데 있다고 주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146)『고려사』 권80, 식화지3, 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癘賑貸之制), 충렬왕 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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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단의 침입 경로
카단의 침입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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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시 고려는 어떤 상황이었기에 원나라로부터 강남미를 구휼 받게 된 것일까? 강남미가 도착한 것은 1291년(충렬왕 17) 6월이었다. 이를 전후한 시기에 고려는 카단(哈丹)이 이끄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카단의 몽고군은 몽고 왕실 내 갈등으로 발생한 내전 과정에서 원 세조 쿠빌라이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여 쫓기면서 고려에 침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카단은 1290년(충렬왕 16)에 침입해 들어온 이래, 1292년(충렬왕 18) 고려와 원나라의 합동 토벌전에 밀려 물러갈 때까지 3년 동안 고려를 전화 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앞서 40여 년간이나 몽고와의 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려는 또다시 몽고 부대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게 된 것이었다. 고려의 세자는 카단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기근을 호소하여 구휼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원나라로서도 자신들의 내분 때문에 고려가 침입의 피해를 입은 데에 대한 책임을 느꼈을 듯하다. 또 원나라는 비록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이 실패하였지만 내심 고려에 보내 준 쌀을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세 번째 원정의 군량미로 이용할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은 후술하듯이 이때 보낸 강남미 10만 석을 일본 원정을 위해 보내 준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강남미 10만 석을 둘러싸고, 받는 자와 주는 자, 즉 고려와 원나라 각자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마침내 강남미 10만 석이 배 47척에 실려 고려에 도착하였다. 이후에도 두 차례 더 강남미가 고려에 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고려에 도착한 양은 첫 번째처럼 많지 않았다. 1292년(충렬왕 18)에도 강남미 10만 석을 보냈지만, 운송 도중 풍랑을 만나 대부분 손실되고 실제 고려에 도착한 것은 4,200석이었다.147)『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 윤6월 신묘 ; 『고려사』 권80, 식화지3, 수한역려진대지제, 충렬왕 18년 윤6월 신묘.

이유야 어쨌든 고려로서는 잘만 활용한다면 무척 도움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강남미 10만 석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얽혀 있었다. 먼저 고려에서 분배 과정부터 문제가 있었다. 원래 원나라에서 고려에 쌀을 보낸 것은 세자의 요청처럼 기근에 시달리는 빈민을 구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7품 이하 관료를 비롯한 부자들에게 분배하였다.148)『고려사』 권80, 식화지3, 수한역려진대지제, 충렬왕 17년 6월.

더구나 고려에 도착한 강남미 10만 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요양(遼陽) 등 다른 지역의 구휼미로 쓰기 위해 고려를 빠져나갔다.

원나라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 애아적(愛阿赤)을 파견해 왔다. 이에 앞서 일본 정벌을 위해 강남미 10만 석이 강화도에 있었는데, 지금 요심(遼瀋: 랴오닝성(遼陽省)의 선양(瀋陽) 지역)에서 기근을 호소하자 원제(元帝)가 조서를 보내와 5만 석으로 그곳을 진휼하게 하였다.149)『고려사』 권31, 충렬왕 20년 12월 경인.

일본 원정 비용으로 강화도에 와 있던 강남미 10만 석 가운데 5만 석으로 요양 지역을 구휼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명령을 받은 1294년(충렬왕 20) 12월 당시 고려에는 강남미가 그렇게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명령을 받은 직후인 1295년(충렬왕 21) 3월 먼저 쌀 1만 석을 배 73척에 실어 요양으로 보냈다. 이어 4월 두 번째로 쌀 1만 2180석을 배 90척에 실어 수송하였다.150)『고려사』 권31, 충렬왕 21년 3월 정사 ; 4월 기묘. 곧이어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요양에 운송해야 할 쌀 액수를 줄여 줄 것을 요청하여 2만 석을 감하도록 허락을 받았다.151)『고려사』 권31, 충렬왕 21년 4월 계묘. 나머지 분량은 윤4월에 8,568석을 배 65척에 실어 수송하였다.152)『고려사』 권31, 충렬왕 21년 윤4월 계유. 그 과정에서는 요양성에서 오히려 강남미 3,000석을 쌍성(雙城)에 보내와 진휼하기도 하였다.153)『고려사』 권31, 충렬왕 21년 4월 기묘 ; 『고려사』 권80, 식화지3, 수한역려진대지제.

결국 고려에 도착한 강남미 10만 석 가운데 요양에 보내야 할 3만 석, 구체적으로는 3만 748석(1만 석+1만 2,180석+8,568석)이 빠져나갔던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때 원나라가 보낸 강남미 10만 석은 단순한 구휼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고려에서의 구휼 이외에도 일본 원정 비용, 기근 발생 시 이동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목적으로 보냈던 것은 아닐까. 이 강남미 10만 석은 고려에 보관해 두고서 향후 발생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원나라는 고려에 혜택을 베풀었다는 측면과 명령 이행 여부로 고려를 더욱 압박할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 쌀을 매개로 한 국제 관계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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