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5. 쌀과 일상생활
  • 당시 사람들의 쌀에 대한 생각
이정호

문종은 몸소 절약과 검소에 힘쓰고 필요 없는 관원들을 축소하였으며, 여러 가지 비용을 줄여 썼다. 대창(大倉: 수도에 있던 쌀 창고)의 곡식이 오래 쌓여 붉게 변할 정도였으며 집집마다 사람마다 생활이 유족하였다. 그러므로 인구가 번성하고 나라가 부유하게 사는 좋은 정치가 이때에 이르러 가장 융성하였다.154)『고려사』 권78, 식화지1, 서문(序文).

고려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는 1451년(문종 1) 완성되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까닭에 고려 왕조의 역사 전개 흐름을 대체로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서술한 경우가 많다. 고려가 건국 후 점차 제도와 문물을 정비해 나가기 시작해서 특히 문종대에 최고조에 도달하였으나, 무신 정권을 겪으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해 고려 말기에 위태로워진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조선이 건국하면서 바로잡게 되었다는 식이다. 왕조 순환론(王朝循環論) 혹은 왕조 흥망 사관(王朝興亡史觀)이라 불리는 서술 태도이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도 문종대야 말로 가장 국가 재정이 충실하고 백성이 풍족하였던 시기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창고에 저장해 놓은 쌀이 변질되어 붉게 된 것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쌀의 저장 정도야말로 나라의 됨됨이를 좌우하는 것이었기에 나타난 표현이었다.

이 밖에도 당시 사람들이 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다. 벼가 특별히 잘 성장한 사례는 상서로운 조짐이었다. 벼의 이삭이 크다거나 한 해 벼를 두 번 수확하는 일은 경사스러운 것으로 특별히 기록되곤 하였다.155)『고려사』 권55, 오행지3, 오행오왈토, 성종 11년 9월 ; 숙종 3년 10월 ; 공민왕 10년 11월 임자.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벼, 그리고 쌀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고, 좀 더 많은 쌀의 수확을 희구(希求)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쌀을 새, 짐승 등이 먹도록 방치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1038년(정종 4) 12월에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건의에 따라 동지(東池)에서 키우고 있던 흰 학, 오리, 산양 등 진귀한 동물을 섬으로 방출하였다. 쌀과 좁쌀을 사료로 써서 비용도 컸을 뿐만 아니라 이들처럼 완상용(玩賞用)으로 보기 좋은 동물 때문에 쌀과 좁쌀 같은 물성(物性)을 손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156)『고려사』 권6, 정종 4년 12월 계미. 이와 같은 사례 역시 쌀의 소중함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물가가 올라 추포(麤布: 거칠게 짠 베) 한 필에 그 값이 쌀 8두나 됩니다. 비록 그것이 풍년이 들었기 때문이라 하지만, 곡식이 천해지는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청컨대 추포의 무게를 달아 보고 그 값을 올리거나 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157)『고려사절요』 권3, 현종 5년 6월.

1014년(현종 5) 물가가 오르자 대책을 건의한 내용이다. 쌀이나 추포는 둘 다 당시 물품 거래에 사용하던 화폐였다. 그런데 물가가 올라 추포 값은 오른 반면 쌀값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풍년이 들어 쌀 생산이 늘어 난 데에도 쌀값 폭락의 원인이 있었다. 그러자 물가 안정을 위해 추포 값을 조정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근거로 쌀과 같은 곡식이 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쌀은 그만큼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사례 역시 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잘 엿볼 수 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방(榜)을 내붙여 이르기를 “백성들 생활의 근본은 쌀에 있으니 백금(白金)이 비록 귀한 것이지만 굶주리고 추운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은병 한 개를 쌀과 환산함에 있어서 서울(개성)에서는 대개 15∼16석으로 하고 지방에서는 대개 18∼19석으로 하되 경시서(京市署)에서 해마다 풍흉을 보아서 값을 정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158)『고려사』 권79, 식화지2, 화폐, 시고, 충렬왕 8년 6월.

1282년(충렬왕 8) 쌀값 안정을 위해 경시서에서 은병과 쌀의 환산 비율을 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백금이 귀하다 하지만 백성들이 굶주리고 추운 것을 막지 못한다. 당시 사람들은 귀한 백금보다 쌀이야말로 백성들의 실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쌀은 백성들 생활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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