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6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제2장 고려시대 쌀의 위상과 생산 소비 문화
  • 5. 쌀과 일상생활
  • 술과 쌀밥 금지령
이정호

가뭄·홍수 등 재해로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는 사치 풍조를 단속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천재지변(天災地變)과 지상의 인간 활동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른바 천인 합일 사상(天人合一思想) 혹은 천인감응 사상(天人感應思想)이라 부르는 유교적 관념에서 나타나게 된 생각이었다.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국왕 또한 스스로 행동과 정치에 잘못이 없는지 반성하였다. 평소 음식보다 반찬 수를 줄여 먹고, 억울한 죄수가 없는지 돌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때로는 가뭄 등 재해로 흉년이 들면, 전국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고 심지어 백성들이 쌀밥 먹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금주령은 풍속을 단속하고 정신을 경건히 한다는 목적에서 내렸다. 이 밖에 술을 만드는 데 쌀을 사용하기 때문에 흉년 때 쌀의 낭비를 막는다는 목적도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231년(고종 18)에 가뭄 때문에 나라에서 청주(淸酒)와 쌀밥 먹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희디흰 쌀밥과 / 粲粲白玉飯

맑디맑은 청주(淸酒)는 / 澄澄綠波酒

모두가 농부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이니 / 是汝力所生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 天亦不之咎

권농사(勸農使)에게 말하노니 / 爲報勸農使

나라의 명령이 혹 잘못된 것 아니오. / 國令容或謬

높은 벼슬아치들은 / 可矣卿與相

술과 음식을 물리도록 먹고 썩히기도 하고 / 酒食猒腐朽

야인(野人)들도 나누어 갖고는 / 野人亦有之

언제나 청주를 마신다오 / 每飮必醇酎

노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데 / 游手尙如此

농부들은 어찌 못 먹게 하는가.159)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권1, 「문국령금농향청주백반(聞國令禁農餉淸酒白飯)」. / 農餉安可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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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청동 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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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들자 나라에서 농부에게 술과 쌀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데 대해 이규보의 생각을 읊은 시이다. 높은 벼슬아치는 흉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술과 쌀밥을 먹고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농부야말로 고생하여 쌀을 생산해 내는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금지 명령으로 쌀밥과 술을 먹고 마시지 못하게 된 점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규보는 흉년에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벼슬아치와 더욱 곤궁해지는 농민들의 비교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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